[문정희]러브호텔 러브호텔 - 문정희 -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물다 .. 글 마당/시인의 마을 2006.04.14
[이종률] 좋은 사람들 좋은 사람들 (1995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이종률 -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비좁다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적다 하지만 햇빛은 좁은 곳 위에서 가루가 될 줄 안다 궂은 날이 걷히면 은종이 위에다 빨래를 펴 널고 햇빛이 뒤척이는 마당에 나가 반듯하게 누워도 좋으리라 담장 밖으론 밤낮 없는 시선.. 글 마당/시인의 마을 2006.04.14
[김이듬]지금은 자위 중이라 통화할 수 없습니다. 1. 팔 너를 만지기보다 나를 만지기에 좋다 팔을 뻗쳐봐 손을 끌어당기는 곳이 있지 미끄럽게 일그러뜨리는, 경련하며 물이 나는 장식하지 않겠다 자세를 바꿔서 나는 깊이 확장된다 나를 후비기 쉽게 손가락엔 어떤 반지도 끼우지 않는 거다 고립을 즐기라고 스스로의 안부를 물어보라고 팔은 두께와.. 글 마당/시인의 마을 2006.04.13
반칠환 시인에 대해 ‘어머니는 마흔넷에 나를 떼려고/간장을 먹고 장꽝에서 뛰어내렸다 한다/홀가분하여라/ 태어나자마자 餘生(여생)이다’(‘일찍 늙고 보니’) 이렇게 해서 반 씨가 겪은 인생이란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그는 ‘삶’이란 시에서 이렇게 썼다. ‘벙어리의 웅변처럼/장님의 무지개처럼/귀머거리의 천둥.. 글 마당/시인의 마을 2006.04.13
[반칠환]한평생 한 평 생 - 반칠환 - 요 앞, 시궁창에서 오전에 부화한 하루살이는, 점심때 사춘기를 지나고 오후에 짝을 만나, 저녁에 결혼했으면, 자정에 새끼를 쳤고, 새벽이 오자 천천히 해진 날개를 접으며 외쳤다. 춤추며 왔다가 춤추며 가노라. 미루나무 밑에서 날개를 얻어 칠일을 산 늙은 매미가 말했다. 득음.. 글 마당/시인의 마을 2006.04.13
[안도현]양철지붕에 대해서 양철 지붕에 대하여 - 안도현 - 양철 지붕이 그렁거린다, 라고 쓰면 그럼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 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 글 마당/시인의 마을 2006.04.13
[최금진] 어둠 속의 모녀 어둠 속의 모녀 -최금진- 백열등 희미한 포장마차 속에서 안경 낀 중년의 여자가 중학생 딸을 안고 운다 가끔은 누가 날 여자로 봐줬으면 좋겠어 쑥 냄새, 마늘 냄새의 씁쓸한 과거를 중얼거린다 여자가 피워 올리는 빨간 담뱃불은 막 첫 생리를 시작한 딸의 입술 같다 어미에게 물려받은 불씨로 탱탱.. 글 마당/시인의 마을 2006.04.13
[최금진] 브래지어 고르는 여자 브래지어 고르는 여자 - 최금진 - 브래지어가 탑처럼 쌓인 리어카 앞에 아이를 업은 갓 서른의 여자가 서 있다 그녀는 어떤 봉긋한 생각을 하며 브래지어를 고를까 그녀도 어둠 속에서 돌아앉아 브래지어를 채우며 쓸쓸할까 일찍 가슴을 동여매고 평평하게 살아온 청상과부 우리 엄마도 남 모르는 두 .. 글 마당/시인의 마을 2006.04.13
[정호승] 밥 그 릇 밥 그 릇 -정 호 승-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번 핥다가 그말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 보았나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 글 마당/시인의 마을 2006.04.13
[이문재]농담 농 담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 글 마당/시인의 마을 2006.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