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시인의 마을 119

[이정하] 첫눈

[첫눈 / 이정하]​아무도 없는 뒤를자꾸만 쳐다보는 것은혹시나 네가 거기 서 있을 것 같은느낌이 들어서이다.그러나 너는 아무 데도 없었다.낙엽이 질 때쯤나는 너를 잊고 있었다.​색 바랜 사진처럼까맣게 너를 잊고 있었다.하지만 첫눈이 내리는 지금,소복소복 내리는 눈처럼너의 생각이 싸아하니떠오르는 것은 어쩐 일일까. ​그토록 못 잊어하다가거짓말처럼 너를 잊고 있었는데... ​첫눈이 내린 지금, 자꾸만 휑하니 비어 오는내 마음에 함박눈이 쌓이듯네가 쌓이고 있었다.

첫눈 오는 날 / 곽재구

첫눈 오는 날 / 곽재구사랑하는마음이 깊어지면하늘의 별을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노래하는마음이 깊어지면새들이 꾸는 겨울 꿈같은 건신비하지도 않아첫눈 오는 날당산 전철역 오르는 계단 위에 서서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펴 들고허공 속으로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사랑하는마음이 깊어지면다닥다닥 뒤엉킨이웃들의 슬픔 새로순금 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노래하는마음이 깊어지면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첫눈이 너그럽게도 왔습니다. 첫눈은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온다네요 첫눈은 참 인색하게 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맘껏 베푸는 마음으로 내려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늘 첫눈을 기다리는 간절함으로 저렇게 넉넉하고 후덕하니 여유가 있음 좋겠습니다 좀 너그럽고, 인색하지 않길..

[정호승 /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자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순백의 골목을 지나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 놓은 군밤을더러 사먹기도 하면서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첫눈 오는 날 만나자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커피..

[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 정현종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 비스듬히

비스듬히 - 정현종 -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 참 좋아하는 시인 어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그 사유의 깊이를 알수도 없고, 이해는 불가능이다. 혼자서 살아갈수 없는 존재 난 누구의 범팀목이 돼 줘본 적이 있나?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온 삶 맑은 곳에 기대자 내게 기대는 모든 것을 맑게 해야하는데ᆢ

[정한모 / 가을에]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오늘이 마침낸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한 추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주돈이 : 주자] 애련설(愛蓮說)

애련설 (愛蓮設)​ - 주돈이​ 물과 땅에서 나는 초목과 꽃 중에 (水陸草木之花)​ 사랑할 만한 것은 매우 많다 (可愛者甚蕃) 진나라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했고 (晉陶淵明獨愛菊)​ 당나라 이래로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매우 사랑했다 (自李唐來世人甚愛牧丹) ​ 나 홀로 연을 사랑하노니 연꽃은 진흙에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予獨愛蓮之出淤於泥而不染) 맑은 물에 씻겼으나 요염하지 않고 (濯淸漣而不妖)​ 속은 비고 밖은 곧으며 (中通外直)​ 덩굴은 뻗지 않고 가지도 치지 아니하며 (不蔓不枝) 향기는 멀리서 더욱 맑고 (香遠益淸) 물 가운데 꼿꼿이 서 있어 (亭亭靜植) 멀리서 바라볼 수 있으나 함부로 매만질 수는 없구나 (可遠觀而不可褻玩焉) ​ 나대로 말한다면 국화는 꽃 중에 은일자요 (予謂菊花之隱逸者也) ..

[도종환] 저녁 무렵

저녁 무렵 / 도종환​​ 열정이 식은 뒤에도 사랑해야 하는 날들은 있다 벅찬 감동 사라진 뒤에도 부등켜 안고 가야 할 사람이 있다​ 끓어오르던 체온을 식히며 고요히 눈감기 시작하는 저녁 하늘로 쓸쓸히 날아가는 트럼펫 소리​ 사라진 것들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풀이란 풀 다 시들고 잎이란 잎 다 진 뒤에도 떠나야 할 길이 있고​ 이정표 잃은 뒤에도 찾아가야 할 땅이 있다. 뜨겁던 날들은 다시 오지 않겠지만 거기서부터 또 시작해야 할 사랑이 있다.

[나의 어머니 / 브레히트]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를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ᆢ * 비가 참 많이 온다. 장마가 시작되나보다. 나를 위해 흘린 어머니의 눈물과 땀보다 적은데 우린 많은 비 장마라고 하니ᆢ

그 날 / 이성복

그 날 그 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 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