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시인의 마을 119

휴게소 / 조현근

[휴게소 / 조현근] 바쁘게 살다가 내몰려 도착한 곳은 병원입니다 구백 리 서울 가는 길에는 휴게소가 열 개를 넘는데 오십 년 내 인생길에는 휴게소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넘어진 김에 쉬어가라 합니다 그러나 병원은 쉬기 위한 휴게소가 아니라 얹혀서 찾아온 바늘이 너무 무서운 용한 어느 할머니집 같습니다 이제 이 집을 나가면 풍광 좋은 추풍령휴게소를 찾아 야외 탁자에 앉아 강원도 찰옥수수를 먹고 천안 삼거리 휴게소에서는 호두과자 한입 맛있게 먹을 참입니다

[이미 너무 많이 가졌다 / 이희중]

이미 너무 많이 가졌다 / 이희중 1 젊은 날 녹음해서 듣고 다니던 카세트 테이프 를 꺼내 듣다가, 까맣게 잊었던 노래 그 노래를 좋아했던 시간까지 되찾고는 한다. 그러니 새 노래를 더 알아 무엇 하나, 이미 나는 너무 많은 노래를 좋아했고 그 노래들은 내 한 시절과 단단히 묶여 있는데 지금 들으면 간주마다 되새길 서사가 있어 귀에 더 두툼하고 묵직하니 이제, 모아둔 음반, 가려 녹음해둔 테이프 를 새겨듣기에도 내 세월이 넉넉하지 않음을 안다. 2 옷장을 열어보면, 기워 입지 않고 버리는 부유한 세상으로 건너오며 한 시절 내가 골라 입었던 적지 않은 옷들, 오늘 내 생애처럼 걸려 있거나 쌓여 있다. 다 아직 입을 수 있는 옷들, 반팔, 반바지는 헌 자리 하나 없다 그러니 새 옷을 더 사 입어 무엇 하나,..

[허의행] 사랑한다는 말

[허의행] 사랑한다는 말 시골 어머니에게 가면 묵은 된장 냄새만 난다 십년 전에 입던 헌옷을 지금도 입고 산다 오랜만에 보면서도 “몸이나 성하냐” 그 한마디뿐이다 된장찌개뿐인 밥을 해 주면서도 “많이 먹어라”는 말 뿐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 그래도 아들딸은 어떻게 낳았을까 어머니는 텃밭에서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들깻잎을 따다 가끔 자기보다 키가 큰 막내아들을 웃음 띤 눈으로 훔쳐만 본다 외양간 암소의 등은 연신 두드려주고 똥개는 수시로 쓰다듬어 주면서 막내아들은 만져보지도 않는다 떠나올 때 “조심해서 가거라” 그 말뿐,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만 본다 어머니에게 가면 흙처럼 부드럽다 만져보고 싶었지만 어머니를 나도 어머니처럼 바라만 본다 어머니도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펌] 첫사랑 / 허의행

“어엿한 남편이 있는 유부녀인 나의 첫사랑 여자는 부끄러움도 없었다” 첫사랑 / 허의행 첫사랑의 여자가 있었다 짐승처럼 나만을 사랑해 주었다. 어엿한 젊고 잘 생긴 남편이 있는 유부녀인 나의 첫사랑 여자는 부끄러움도 없었다. 남편이 밤낮으로 사랑해주는데도 서툴고 미숙했던 내가 해주는 사랑을 남편의 능숙한 사랑보다 더 좋아했으며 순수한 사랑이라고 했다 남편과의 사랑은 껍질만 남아 있다고 속삭였다. 남편이 죽으면 따라서 죽을 수는 없어도 내가 죽으면 따라서 죽는다고 약속했었다 첫사랑 여자와 입도 맞추었고 옷을 헤집고 젖도 만지고 밤새도록 안아주어야 잠을 잤다 한 때는 첫사랑 여자가 없으면 나도 죽는다고 다짐했었다 첫사랑 여자보다 젊고 예쁜 여자의 매력을 느낄 줄 알면서부터 나는 첫사랑 여자를 미워했으며 젊고..

산 ( 글 / 김영석)

아주 먼 옛날 가슴이 너무나 무겁고 답답하여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한 사내가 밤낮으로 길을 내달려 마침내 더는 나아갈 수 없는 길 끝에 이르렀습니다 그 길 끝에 사내는 무거운 짐을 모두 부렸습니다 그 뒤로 사람들은 길 끝에 이르러 저마다 지니고 있던 짐을 부리기 시작하고 짐은 무겁게 쌓이고 쌓여 산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길 끝에 높고 낮은 산들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