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지 않은 일을 하고 나면 일상 풍경이,
뭐랄까,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어요. 하지만 겉모습에 속지 않도록 하세요.
현실은 언제나 단 하나뿐입니다.”
“수학이란 물의 흐름 같은 거야.” 덴고는 말했다.
“물론 까다로운 이론도 아주 많지만 기본적인 이치는 대단히 심플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최단거리로 흐르는 것과 같이
수학의 흐름도 한 가지밖에 없어.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이치가 저절로 보여.
나는 그냥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하면 돼. 아무것도 안해도 괜찮아.
의식을 집중해서 응시하고 있으면 자기 쪽에서 모두 분명하게 밝혀줘.
그렇게 친절하게 나를 대해주는 건 이 넓은 세상에 수학밖에 없어.“
“단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인생에는 구원이 있어.
그 사람과 함께하지 못한다 해도.”
“하지만 메뉴든 남자든 다른 뭐든, 우리는 스스로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건지도 몰라.
그건 이미 일찌감치 정해진 일이고, 우리는 그저 선택하는 척하고 있는 것뿐인지도.
자유의지라는 거, 그저 나만의 선입견인지도 모르지.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만일 그렇다면 인생은 정말 암울해.”
“그럴지도”
“하지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게 아무리 형편없는 상대라 해도,
그쪽이 나를 좋아해주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인생은 지옥은 아니다.
가령 약간 암울하더라도.”
“티베트의 번뇌의 수레바퀴와 같아.
수레바퀴가 회전하면 바퀴 테두리 쪽에 있는 가치나 감정은 오르락내리락해.
빛나기도 하고 어둠에 잠기기도 하고.
하지만 참된 사랑은 바퀴 축에 붙어서 항상 그 자리 그대로야.”
“생쥐 한 마리가 다락방에서 커다란 수컷 고양이와 덜컥 마주쳤어.
생쥐는 도망칠 곳도 없는 구석까지 몰렸어. 생쥐는 벌벌 떨면서 말했지.
‘고양이님, 제발 부탁이에요. 나를 잡아먹지 말아주세요.
나는 내 가족들에게 돌아가야 한답니다.
어린 자식들이 배를 곯고 기다리고 있어요. 부디 나를 좋아주세요.’ 고양이는 말했어.
‘아, 걱정할 거 없어. 너를 잡아먹거나 하진 않아.
사실은 큰 소리로 할 얘기는 아니지만, 나는 채식주의자야. 고기는 일절 먹지 않아.
그러니 나를 만난 건 너에게는 큰 행운이야.’
생쥐는 말했어.
‘아아, 얼마나 멋진 날인가. 나는 얼마나 큰 행운을 거머쥔 생쥐인가.
채식주의자 고양이를 만나다니.’
하지만 다음 순간,
고양이는 생쥐에게 달려들어 발톱으로 몸을 움켜쥐고 날카로운 이빨로 목덜미를 물었어.
생쥐는 고통으로 헐떡이며 마지막 숨을 몰아 고양이에게 외쳤어.
‘아니, 당신은 채식주의자라서 고기는 일절 먹지 않는다면서요. 그건 거짓말이었나요?’
고양이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말했어.
‘응, 나는 고기는 일절 먹지 않아. 그건 거짓말이 아냐.
그래서 너를 물고 가서 상추와 바꿔 먹을 거야.”
나라는 존재의 핵심에 있는 것은 無가 아니다.
황폐하고 메마른 사막도 아니다.
나라는 존재의 중심에 있는 것은 사랑이다.
나는 변함없이 덴고라는 열 살 소년을 그리워한다.
그의 강함과 총명함과 다정함을 그리워한다.
그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육체는 멸하지 않고, 서로 나누지 않은 약속은 깨지는 일이 없다.
“나는 누군가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살아가는 데 지쳤어요.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살아가는데도 치쳤습니다.
내게는 친구가 없어요. 단 한사람도.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해요.
왜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가. 그건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그런 행위를 통해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거예요.
내가하는 말, 알아들어요?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는 없어요.
아니, 그게 아버지 탓이라는 게 아니에요.
생각해보면 아버지도 역시 그런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죠.
아버지도 아마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잘 몰랐을 거예요. 안 그래요?“
“세상에는 모르는 채로 덮어두는 게 좋은 일도 있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당신 어머니 일도 그래요.
진상을 알게 되면 그건 당신에게 상처가 돼요.
그리고 일단 진상을 알게 되면 거기에 대한 책임도 떠맡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실증 가능한 진실 따위는 원하지 않아.
진실이란 대개의 경우, 자네가 말했듯이 강한 아픔이 따르는 것이야.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은 아픔이 따르는 진실 따윈 원치 않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건 자신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의미있게 느끼게 해주는
아름답고 기분 좋은 이야기야. 그러니 종교가 성립되는 거지.“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선도 없고 절대적인 악도 없어.” 남자는 말했다.
“선악이란 정지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장소와 입장을 바꿔가는 것이지.
하나의 선이 다음 순간에 악으로 전환할지도 모르는 거야. 그 반대의 경우도 있지.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묘사한 것도 그러한 세계의 양상이야.
중요한 것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선과 악에 대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면 현실적인 모럴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돼.
그래, 균형 그 자체가 선인 게야.“
“시스템이라는 건 일단 모양새가 만들어지면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는 것이야.”
“복수만큼 코스트는 높고 이익은 생기지 않는 일은 없다. 고 누군가 말했죠.”
“윈스턴 처칠이야.
다만 내 기억으로는 그는 대영제국의 예산부족을 변명하기 위해 그 같은 발언을 했지.
거기에는 도의적인 의미는 없었어.“
“의미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언어로 설명되는 순간에 상실되고 마는 의미도 있어.“
설명해주지 않으면 모른다는 건 설명해줘도 모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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