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 불 (작가:최명희) 제1권 "낮 모르는 사람끼리 처음으로 만나서, 무슨 정이 그렇게 샘물같이 솟아난다냐. 사람의 정이란 나무 키우는 것 한가지라. 그저 성심껏 물주고 보살피고 믿어 두면, 어느새 잎사귀도 나고, 꽃도 피고, 언제 그렇게 됐는가 싶게 열매도 여는 것이다. 생각해봐라. 아무리 좋은 나무라도 울안에 갖다가 심어놓고 천대허면 못 크는 법이 아니냐...... 정도 그와 꼭 같으다. 이왕에 정해진 일, 이제 와서 물릴 수도 없는 것이고...... 내 맘 하나 먹는 것에 따라서 여자의 한평생이 죽고 사는 일이 달렸다면, 어쩌든지 내가 맘을 다숩게 먹어야지......안 그러냐...... 사람 하나 잘못되는 것......순간의 일이지." -결혼을 한 강모가 효원에게 마음주지 않는 것에 대해 기응이 강모에게- "사람은 즉, 몫을 스스로 알아야 한다. 한 섬지기 농사를 짓는 사람은 근면하게 일하고 절약하여 자기 가솔을 굶기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열 섬지기 짓는 사람은 이웃에 배 곯는 자 있으면 거두어 먹여야 하느니라. 백 섬지기 짓는 사람은 고을을 염려하고, 그보다 다른 또 어떤 몫이 있겠지" -저수지 공사에 대해 반대하는 것을 청암부인이 이기채에게 - "기다리는 것도 일이니라. 일이란 꼭 눈에 띄게 움직이는 것만이 아니지 모든 일의 근원이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인즉, 네가 중심을 가지고 때를 고요히 기다리자면 마음이 고여서 행실로 넘치게 마련 아니냐. 이런 일이 조급히 군다고 되는 일이겠는가. 반개한 꽃봉오리 억지로 피우려고 화덕을 들이대랴, 손으로 벌리랴. 순리가 있는 것을......" -강모가 마음을 열지 않는 것에 대해 청암부인이 효원에게- 제2권 "대상 없는 허공을 향하여 사는 것보다 더 고달픈 일은 없느니....... 장애가 디딤돌 되는 일도 있으매, 묶여서 오히려 떠내려 가지 마소. 비록 그 사람이 오늘은 여기에 없지만 기다리는 마음으로 집을 지키고 있게." -청암부인이 인월댁에게 이른말- "이 세상에 제일 큰 것은 마음이다. 마음 안에는 담지 못할 것이 없느니" -효원의 어머니가 효원에게- 물이란 그릇에 따라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좁은 통에 들어가면 좁아지고 넓은 바다에 쏟으면 넓어진다. 낮으면 아래로 떨어지고 높으면 그 자리에 고인다. 더우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추우면 얼어 버린다. 그릇과 자리와 염량(炎凉)에 따라 한 번도 거역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순응하지만, 물 자신의 본질은 그대로 있지 않은가. 모습과 그릇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땅 속으로 스며들어간 물은 없어진 것처럼 보이지마는 지하수가 되어 샘물을 이루고, 하늘로 증발한 물은 이윽고 구름이 되어 초목을 적시는 비를 이룬다. 대저 형식에 집착한다는 것이 무엇이랴. 보이는 것에 연연하여 보이지 않는 것의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오히려 형식에 본질이 희생을 당하는 것이리라. (중략) 얼음이 아무리 두꺼운들 실낱같은 봄바람을 어찌 이기며,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천지를 한 입에 삼킬 것 같아도, 구름이란 세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무게를 못 이기어 빗방울이 되고 마는 법. 기다리면 때가 안 오랴..... -암담한 세월에 대한 이기채의 탄식- "놉은 남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집 농사를 지어 주는 우리 손이요, 우리 발 아닌가요? 놉을 남이라고 생각하면 놉도 우리를 남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일에 제 몸을 부릴 때 누가 성심을 다 허겠어요. 눈치보고 꾀부리고 한눈 파는게 당연하지요. 우리가 놉한테 주는 밥그릇을 애끼면, 놉도 우리한테 주는 힘을 애끼는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 아닌가요? 아무리 종이라도 신분이 낮아 천한 대접을 받을 뿐, 사지에 오장육부는 똑같이 타고났고, 그 속에 마음이 있는 것은 양반이나 무에 다르겠습니까? 마음에서 우러나야 몸이 움직이는 법인데 배를 곯리고 마음을 상하게 한 뒤에 무슨 정성을 바랄 수 있을까요? 많이 먹고 즐거워서 힘이 나면 결국은 내 집 일을 그만큼 흥겹게 할 터이니, 한 그릇의 밥을 더 주고 한 섬지기 쌀을 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낄 것이 따로 있지 밥심으로 일하는 일꾼들한테다 몇 숟가락 밥을 아낀다고, 그것이 쌓여 노적가리가 되어 주겠습니까......" -쌀을 많이 퍼주었다는 시모 율촌댁에게 효원이 고한 말- "사람이 무슨 일을 할 때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자기 속에 심중을 가지고 할 것입니다. 심중을 가지고 한 일이라면, 남이 무어라고 한다 해서 쉽사리 부화뇌동, 주견도 없이 남의 의견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하지 않음만 못합니다. 이번 제가 한 일이 설령 어머님 보시기에 잘못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평소에 제 생각이 그랬던 것이라 아직은 잘못이라고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속으로는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겉으로만 용서를 빈다는 것은 오히려 어른께 욕되는 처사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속으로는 비웃으면서 겉으로는 아부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바 없으니, 어른을 능멸하는 일입니다. 그저 앉은 자리나 모면하자는 얕은 잔꾀로 어머님께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무라는 시모 율촌댁에게 효원이 고한 말- "전생이라는 것이 참으로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지만, 전생에서 서로 지극한 업을 지은 사람들은 이승에서도 지극한 사이로 다시 만난다 하더라. 서로 베푼 마음이 간절하고, 선한 공덕을 많이 쌓은 사람들이 부부나 부모자식간으로 인연을 맺는다는게야. 그러니 오죽이나 애지중지하는 사이겠는가. 허나 반대로 원수 척을 진 사람들이 또 그렇게 뗄 수 없는 인연으로 가까운 곳에 태어나거나 만나거나 한다는 말을 들었다" -청암부인이 동녘골 강수의 죽음을 보고 이기채에게 이른 말- "인연이란 조심해서 맺어야지. 원수를 지어 놓으면 갚어야 할게 아닌가. 뼛골에 사무친 원수를 갚는 길은 서로 뗄 수 없는 처지로 만나 평생동안 지척에서 괴롭히는 일이거나, 기가 막히게 애틋한 사이에서 먼저 죽어 버려 남은 사람들을 애통하게 하는 일이 아니겠느냐. 원수도, 은혜도, 너무 지극해서 갚으려 할 때는 한 다리만 건너도 벌써 힘이 약해져 안되지. 한 지붕 아래 한 방의 한 이불 덮는 사이가 아니면 갚기 어려운 것이다." -청암부인이 동녘골 강수의 죽음을 보고 이기채에게 이른 말- "사람의 마음이란 다스리면 성현 군자도 되고 제세 영웅도 되지만, 자칫 고삐를 놓친다면 사나운 말 한가지라. 내 속에서 우러나온 마음이 결룩은 나를 발길질하고 짓밟게 되지. 미처 피하지 못하면 그대로 밟혀 죽는 게야. 허나, 잘 다스리고 길들이고 정성껏 보살피면 천리라도 달리는 준마가 되고, 일세를 풍미하는 명마도 되네. (중략) 사실은 눈에 뵈는 것의 주인은 눈에 안 보이는데 있거든...... 심정이야 어디 손에 잡히는가? 허나, 이 심정이 상하면 밥을 먹어도 체하고, 심정이 슬프면 마른 눈에도 눈물이 고여 흐르는 이치를 생각해 보게. 형체 없는 마음이 능히 목숨조차도 삼키는 것이 놀랍고 두려울 뿐이네" -청암부인이 동리 사람들에게 이른 말- "사람이 한평생을 살자면 좋은 일 궂은 일이 어찌 뜻대로만 된다든가. 십 리 길만 가자해도, 황소도 만나고, 지렁이도 밟고,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기도 하네. 인생이 그보다 더 멀고 긴 것이니 잊어 버리게나." -청암부인이 자식잃은 동녘골댁에게 이른 말- "그저 여자란 땅이라 하지 않드냐. 무슨 씨앗이든지 뿌리면 싹이 나고, 천지만물을 다 그 속에 품어주는 다수운 것이 여자라야 헌다." -율촌댁이 효원을 표현한 말- "끓어 넘치는 국물도 시간이 가면 미지근해지고, 더 두면 썰렁해지는 법. 사람이라고 다르랴. 허나 그렇게 식기까지 기다릴 수조차도 없어서 입김으로 불고 부채질로 찬바람을 일으키어 서둘러 식히는 일도 더러는 있다. 우리 두사람 마주보고 앉아 서로의 기구한 명운을 탄식하고는 있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의 몸이란 살로만 되어 있지는 않은 것. 뼈로는 일을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내 비록, 더불어 정을 나눌 사람이 없어 그쪽으로는 죽은 목숨이나 진배없으나, 아직은 뼈가 젊으니 일을 해야지." -청암부인의 결심- 제 7권 양반이란 배워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양반은 겉보기에는 위용 있고 고결하고 신선같이 때깔 있지마는, 그 속은 민어가시보다 억세고, 섬세하고, 미묘하고, 까다로워 그 노릇을 제대로 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것이라. 일일이 무엇이나 말 안해도 저절로 터득해서 어느 자리에 서든지 앉든지, 오직, 그 몸에서 우러나온 자연스러움이 둘레에 향내로 번져, 돌아서면서도 마음이 그 사람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양반의 인품이고 기품이다. -오류골댁이 강실이에게- 옛날부텀도 복이 너무 차면 쏟아진다고, '항상 어느 한 구석은 허름한 듯 부족한 듯 모자라게 두어야 한다' 했니라. 천석꾼 만석꾼 부잣집에서도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대궐마냥 덩실하니 짓는 거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대문만은 집채 규모에 당치않게 허술하거나 아담 조그맣게 세웠고, 작명을 할 때 또한 사방 팔방이 복으로만 복으로만 숨통이 막힐 만큼 꽉 차게 짓지는 않는단다. 지나지면 터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거든. -오류골댁이 강실이에게- |
'글 마당 > 책마을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성기]굴원의 노래 (0) | 2004.12.23 |
---|---|
[독후감]한 인간의 생애-숄로호프 (0) | 2004.12.15 |
[독후감] 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0) | 2004.12.15 |
발췌문] 만남, 은어와 보낸 하루 (0) | 2004.12.14 |
[독후감] 만남, 은어와 보낸 하루 (0) | 2004.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