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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모 / 가을에]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오늘이 마침낸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한 추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주돈이 : 주자] 애련설(愛蓮說)

애련설 (愛蓮設)​ - 주돈이​ 물과 땅에서 나는 초목과 꽃 중에 (水陸草木之花)​ 사랑할 만한 것은 매우 많다 (可愛者甚蕃) 진나라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했고 (晉陶淵明獨愛菊)​ 당나라 이래로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매우 사랑했다 (自李唐來世人甚愛牧丹) ​ 나 홀로 연을 사랑하노니 연꽃은 진흙에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予獨愛蓮之出淤於泥而不染) 맑은 물에 씻겼으나 요염하지 않고 (濯淸漣而不妖)​ 속은 비고 밖은 곧으며 (中通外直)​ 덩굴은 뻗지 않고 가지도 치지 아니하며 (不蔓不枝) 향기는 멀리서 더욱 맑고 (香遠益淸) 물 가운데 꼿꼿이 서 있어 (亭亭靜植) 멀리서 바라볼 수 있으나 함부로 매만질 수는 없구나 (可遠觀而不可褻玩焉) ​ 나대로 말한다면 국화는 꽃 중에 은일자요 (予謂菊花之隱逸者也) ..

[도종환] 저녁 무렵

저녁 무렵 / 도종환​​ 열정이 식은 뒤에도 사랑해야 하는 날들은 있다 벅찬 감동 사라진 뒤에도 부등켜 안고 가야 할 사람이 있다​ 끓어오르던 체온을 식히며 고요히 눈감기 시작하는 저녁 하늘로 쓸쓸히 날아가는 트럼펫 소리​ 사라진 것들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풀이란 풀 다 시들고 잎이란 잎 다 진 뒤에도 떠나야 할 길이 있고​ 이정표 잃은 뒤에도 찾아가야 할 땅이 있다. 뜨겁던 날들은 다시 오지 않겠지만 거기서부터 또 시작해야 할 사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