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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