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만한 지나침
기형도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 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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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읽어서 느낌이 전혀 없는 시가 있다.
아니 읽어보면 뭔가 있는데 손에 잡히지 않고,
몇 번을 곱씹어 읽다가 적당히 포기하려 할 때
강하게 다가오는 글이 있다.
기형도의 시는 내게 있어 대부분 그렇다.
위 시의 [지나침]이란 ' 지나간다'는 뜻이다.
'너무'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 울고 있는 그 서기의 모습이 현재의 내 모습?
현대인들의 지나친 고독, 압박, 삶의 회의가 확 다가온다.
지금의 내 모습...
나도 기형도 처럼 그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에 지나지 않으면 좋으련만.....
기형도의 시는 너무 삭막하다.
한 겨울의 나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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