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내가 살던 작은 초가집은 천장이 참 낮았다.
낮은 천장의 안방 벽에는 장식도 없는 조금은 초라한 액자가 걸려 있었다.
거기엔 시집가서 농사일로 많이 늙어버린 고모의 처녀시절 사진과 함께
월남 간 외삼촌의 군복입은 사진이 그 옆에 자리잡고 있고,
큰 형님의 약혼식 사진과 함께 꽃다발을 목에 건 큰 누나의 졸업사진 뿐 아니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찍은 엄마 사진과
그 밑 한 귀퉁이에 존재감을 찾고 있는 내 사진도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추억의 액자가 떠올랐다.
까맣게 잊고있던 아주 오래 전 그 액자 속 사진 한 장 한 장이 오롯이 되살아나면서
나를 살갑게 보아주었던 그 사진의 주인공들이 웃어준다.
책에 수록된 김소운님의 [가난한 날의 행복]을 비롯해
피천득님 [나의 사랑하는 생활] [봄] [수필],
이양하님의 [신록예찬] [나무], 정비석님 [산정무한],
유달영님 [초설에 부쳐서], 민태영님 [청춘예찬],
남미영 [노란 종이우산], 양주동 [질화로] 등은 중, 고등학교 교과서나
대학생 시절 교양과목 국어시간에 한번씩 보고 배운 수필들로
청소년기 시절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추억의 시간여행이 됐다.
읽는 중간 중간 3, 40년 전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과
그 당시의 느낌이 고향집 안방에 걸려있던 사진들과 함께
흑백영화를 감상하는 착각에 빠져드는 추억에 젖어들며,
모처럼 봄 쑥으로 끓인 구수한 된장국을 맛본 느낌.
[가난한 날의 행복], [행복한 군고구마]를 읽을 땐 가슴이 후끈 달아오르고,
손광성님의 [장작패기]를 보며 장작을 패보고 싶다는 생각과
김소운님의 [도마소리]와 서영은 님의 [거기에 해바라기가 있었다]를 통해
정깊은 사람들의 애틋한 사랑의 추억을 떠올린다.
특별히 박문하님의 [어떤 왕진]을 읽으면서 작가 내면의 온정과 함께
그 시대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점점 심화되는 빈부 격차로
꼭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다른 상황에서 지금의 아픔을 생각한다.
책을 덮으면서
다시한번 옛날의 그 액자를 떠올려본다.
그 액자를 없앤 건 다름아닌 나였다.
그 액자 속에 슬프고도 아픈 기억을 지우기 위해......
33살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런 뇌출혈로 돌아가신 작은형님의 고등학교 때 사진
그 액자를 볼 때마다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난 아들을 떠올리며 아파할 어머니를 생각하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슬며시 없애버린 그 액자.
아흔 한해를 사시면서 그 액자처럼 늙어버린 삭정이 같은 어머니.
지금 그 액자가 한쪽 벽에 걸려있다면 아픈 기억마저도 행복을 만들어줄지도 모르는데......
그 액자에 있던 많은 사람들 중 대부분 지금 이 세상에 없지만
이 책을 통해 내 속에서 잔잔한 흑백사진으로 되살아난다.
오늘 저녁 그 때 갈무리해 둔 몇 장의 흑백사진을 엄마와 함께 들여다 봐야지.
[도란도란 이야기]코너에 이 책을 처음 읽을 때의 느낌을 적으면서
이 책을 아껴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기한 내 서평을 써야한다는 생각도 있지만 책을 읽기보다는
먼저 내 마음 밭을 갈아 엎어놓고 책을 읽고 싶었다.
따뜻한 언어의 글들이 내 마음 속에서 싹을 틔우게 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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