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이 힘든 시기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젠 지쳤다’며 운명의 줄들을 놓아버리고 있다. 그들에게, 나의 다른 모습인 그네들에게 뭔가 줄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을까?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곁에 있어 주는, 모든 중생이 제도 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이 떠올려진다. 자, 이제 우리도 각자가 지닌 원초적 선물을 돌아보자. 누군가의 곁에 있어 주자. 나를 너에게 선물하자.
2년 전이었던 같다. 용산의 국립박물관에서 고려시대 불화를 전시한 적이 있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고려 시대 불화들을 한데 모은 귀한 전시였다. 전시회 제목이 ‘700년 만의 해후’였는데, 내 지인 중 한 사람은, 아마 이 작품들을 다시 보려면 또 700년이 걸릴지 모른다고 너스레를 떨 정도였다. 정말이지 대부분의 작품이 국보급,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중에서도 내 눈을 휘둥그레 하게 한 것은 고려 시대 후기에 그려졌다는 두 개의 ‘수월관음도’였다. 하나는 일본의 단잔진자(談山神社)의 소장품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센소지(淺草寺) 소장품이었다. 모두 <법화경>의 ‘관음보살보문품’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린 것인데, 앞 작품에서는 관음보살이 연화대에 앉은 채 지긋이 선재동자를 바라보고 있고, 뒤 작품에서는 녹색 물방울 모양의 광배 안에서 관음보살이 선 채로 선재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후 어느 스님을 뵐 기회가 있어 꿈 이야기를 했다. “저는 관음보살이 부러워죽겠는데 지장보살께 잡혀서 한 대 맞았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이 빙긋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관음보살은 오늘날로 따지면 재벌회장 같은 분입니다. 정말로 가진 게 많지요. 그것을 모두 나눠줍니다. 그 이름만 부르면 누구에게나 줍니다. 그런데 지장보살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줄 게 없지요. 그런데 지장보살은 그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곁에 있어 줍니다.”
‘있어줌’. 이 말에서는 ‘있음’과 ‘줌’, 다시 말해 ‘존재’와 ‘선물’이 일치한다. 독일어에서는 ‘무엇이 있다’는 말을 ‘Es gibt~’라고 한다. 여기서 ‘gibt’라는 동사는 ‘주다’는 뜻의 ‘geben’에서 온 말이다. 그러니 ‘있음’이 곧 ‘줌’이다. 존재가 선물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존재’가 ‘선물’이라는 말을 고상한 미사여구 정도로 받아들이지 말기를 부탁드린다. 힘든 시절, 힘든 시절, 바로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젠 지쳤다’며 운명의 줄들을 놓아버리고 있다. 신문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뭔가 줄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을까. 그래서 떠올린 말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우리들이 가진 원초적 선물이 필요하다. 곁에 있어 주자. 나를 너에게 선물하자.
고병권- 시민의 철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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