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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당신은 선물입니다.

나무소리 2013. 2. 14. 11:00

곁을 지키는 것만으로, 당신은 선물입니다

지금 이 힘든 시기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젠 지쳤다’며 운명의 줄들을 놓아버리고 있다. 그들에게, 나의 다른 모습인 그네들에게 뭔가 줄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을까?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곁에 있어 주는, 모든 중생이 제도 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이 떠올려진다. 자, 이제 우리도 각자가 지닌 원초적 선물을 돌아보자. 누군가의 곁에 있어 주자. 나를 너에게 선물하자.

2년 전이었던 같다. 용산의 국립박물관에서 고려시대 불화를 전시한 적이 있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고려 시대 불화들을 한데 모은 귀한 전시였다. 전시회 제목이 ‘700년 만의 해후’였는데, 내 지인 중 한 사람은, 아마 이 작품들을 다시 보려면 또 700년이 걸릴지 모른다고 너스레를 떨 정도였다. 정말이지 대부분의 작품이 국보급,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중에서도 내 눈을 휘둥그레 하게 한 것은 고려 시대 후기에 그려졌다는 두 개의 ‘수월관음도’였다. 하나는 일본의 단잔진자(談山神社)의 소장품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센소지(淺草寺) 소장품이었다. 모두 <법화경>의 ‘관음보살보문품’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린 것인데, 앞 작품에서는 관음보살이 연화대에 앉은 채 지긋이 선재동자를 바라보고 있고, 뒤 작품에서는 녹색 물방울 모양의 광배 안에서 관음보살이 선 채로 선재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관음보살, 깨달음과 아름다움의 현현
센소지의 ‘물방울 관음’은 그때 처음 본 것이지만, ‘수월관음도’는 내가 공부하는 연구실에도 한동안 걸려 있었다. 물론 진품은 아니었고, 어느 스님께서 대형 아트 프린트 작품을 액자에 넣어 보내주신 거였다. 그림의 전체적 인상은 단잔진자의 ‘수월관음도’와 비슷했던 것 같다. 외람된 말이지만, 보살의 풍만한 몸은 부드럽게 흘렀고, 몸에 걸친 사라는 한 없이 가벼웠으며, 거기 달린 각종 보석과 장신구들은 들여다볼수록 섬세하고 정교했다. 부처와 보살도 잘 구별하지 못하던 때, 난 혼잣말을 뱉었던 것 같다. ‘무슨 부처가 이리도 관능적인가.’ 심지어는 그 그림 속 관음보살에게 우스꽝스러운 콤플렉스를 느끼기도 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관음보살의 깨달음이 아니라 예술적 감각이었다. 주변에 보면, 공부도 잘하면서 예술적 감각도 뛰어난, 정말 ‘잘난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마치 그런 존재를 보는 것 같았다. 내 눈에는 그 분이 깨달아서 아름답다기보다, 깨달았으면서 아름답기까지 했다.

지장보살,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곁붙이
그런데 2년이 지난 지금, 그날의 전시를 떠올린 것은 관음보살도 때문이 아니다. 전시를 본 날 묘하게도 꿈에 나타난 그림이 있었다. 어느 ‘지장보살도’였다. 남루한 가사에 지팡이를 들고 스님처럼 보이는 분이 서 있었다. 눈은 가늘었지만 눈동자는 또렷했고, 살은 근육 없이 뼈에 붙은 듯했으나 무척 두텁고 단단해 보였다. 그런데 그날 밤 그림 속 그분이 쫓아와 내 머리를 내리치는 꿈을 꿨다. 낮에 무서운 걸 보면 밤에 그걸 다시 보는 아이들의 꿈같은 것이었다.
며칠 후 어느 스님을 뵐 기회가 있어 꿈 이야기를 했다. “저는 관음보살이 부러워죽겠는데 지장보살께 잡혀서 한 대 맞았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이 빙긋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관음보살은 오늘날로 따지면 재벌회장 같은 분입니다. 정말로 가진 게 많지요. 그것을 모두 나눠줍니다. 그 이름만 부르면 누구에게나 줍니다. 그런데 지장보살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줄 게 없지요. 그런데 지장보살은 그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곁에 있어 줍니다.”
 
원초적 선물을 하자. 곁에 있어 주자.
그때는 ‘그렇구나!’ 하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문득 ‘있어 준다’는 그 말이 한없이 큰 선물처럼 다가온다. 지장보살. 그는 부처 없는 시대에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한다는 보살로, 모두가 성불할 때까지, 다시 말해 지옥이 텅텅 빌 때까지 자신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운 걸로 유명하다. 묘한 역설이다. 서원대로라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늦게 성불할 존재이다. 하지만 그런 서원을 세운 걸 보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빨리 성불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어떻든 지옥에 단 한 사람도 남겨두지 않고 성불할 때까지 곁에 있겠다는 그 무지막지한 서원 때문에 ‘업보가 정해져 있다’거나 ‘해탈 불가능한 존재가 있다’거나 하는 말들은 모두 힘을 잃어버렸다. 그가 있으면 ‘업보’도 ‘불가능’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끝까지 ‘네 곁에 있겠다’는 말은 그처럼 위대하다.
‘있어줌’. 이 말에서는 ‘있음’과 ‘줌’, 다시 말해 ‘존재’와 ‘선물’이 일치한다. 독일어에서는 ‘무엇이 있다’는 말을 ‘Es gibt~’라고 한다. 여기서 ‘gibt’라는 동사는 ‘주다’는 뜻의 ‘geben’에서 온 말이다. 그러니 ‘있음’이 곧 ‘줌’이다. 존재가 선물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존재’가 ‘선물’이라는 말을 고상한 미사여구 정도로 받아들이지 말기를 부탁드린다. 힘든 시절, 힘든 시절, 바로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젠 지쳤다’며 운명의 줄들을 놓아버리고 있다. 신문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뭔가 줄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을까. 그래서 떠올린 말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우리들이 가진 원초적 선물이 필요하다. 곁에 있어 주자. 나를 너에게 선물하자.

 

고병권- 시민의 철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