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 사매면 노봉마을에 위치한 [혼불 문학관]을 찾아 먼길을 나섰던 날은 2월하고도 초순,
절기상 겨울이지만 봄비같은 이슬비가 몇 방울 날리던 포근한 날이다.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소설 [혼불]은 故최명희님의 역작이다.
노봉마을은 [혼불] 속 매안마을의 배경이 되었던 마을이며, 또한 작가의 부친의 본향이며 삭녕최씨의 세거지(世居地)로 되어 있다.
[혼불]은 1930년대 남원 매안 마을 이씨 집안의 종부 3대인 청암부인과 율촌댁, 효원아씨를 축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며 당시의 시대상이나 풍속사, 그 이전 남원지역의 역사까지 일일이 고증을 거쳐 세세히 기록되어 있는, 10권으로 구성된 대하소설이다.
혼불문학관 안내책자에서 옮겨 본 [혼불]의 줄거리
-청상의 몸으로 다 기울어져 가는 이씨 집안을 힘겹게 일으켜 세운 청암부인,
그리고 허약하고 무책임한 종손 강모를 낳은 율촌댁,
그 종손과 결혼한 효원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이 전통사회의 양반가로서 부덕을 지켜내는 보루로 서 있다면,
그 반대편엔 치열하게 생을 부지하는 하층민의 '거멍굴 사람들'이 있다.
특히 양반계층을 향해 서슴없이 대거리하는 옹구네와 춘복이,
당골네인 백단이가 강력한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이런 갈등의 그물은 우선 효원과 혼례를 치른 강모와 사촌 여동생인 강실이 사이에서 시작된다.
애틋하게 바라만 보아오던 두 사람이 아침내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음으로써 제각기 가파른 벼랑으로 내몰린다.
우유부단한 강모는 기생 오유끼와 함께 머나먼 만주 봉천땅으로 도피를 해 버리고,
강실이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홀로 삭이며 닥쳐오는암운 앞에 무방비로 놓인다.
한편 이들에 대한 소문이 거멍굴로 전해지고,
자기 자식만은 자신과 같은 운명에 놓여선 안 된다고 생각한 춘복이는 양반댁 강실아씨를 탐내기 시작한다.
춘복이와 몰래 동거를 하던 옹구네도 양반에 대한 복수심, 그리고 춘복이를 잃고 싶지 않은 집착에서 남모를 음모를 꾸미게 된다.
그 음모란 사건의 소문을 퍼뜨려서 강실이를 내치게 하고 그 때를 노려 춘복이가 강실이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은밀히 옹구네가 퍼뜨린 소문은 그물처럼 강실이와 효원을 조여들기 시작하고,
그 와중에 춘복이는 강실이를 범하여 임신시키게 된다.
이후 이런 모든 정황을 알게 된 효원은 애증이 교차된 마음으로 강실이를 피접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옹구네가 중간에서 강실이를 납치함으로써 상황은 예기치 않은 국면으로 치닫는다.
.................
줄거리는 혼불문학관 안내책자에서 옮김-
혼불문학권역에 들어서자 맨 처음 눈에 띈 곳은 서도역.
지금은 새 역이 생겨 서도역은 이전을 했고, 이 곳은 영상촬영장으로 남아 있다.
이 곳을 통해 효원아씨가 신행을 왔고 유학시절의 강모가 진주와 매안을 오갔던 곳이다.
1932년에 지어졌다는 역사는 말끔히 관리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들어설 것 같지만 지금은 남원시에서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해 놓은 영상촬영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길을 보면, 특히 철길을 보면 나는 누군가를 지금 이 순간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곤한다.
저 나무는 얼마나 오랜 세월을 서도역과 함께 했을까.
대실에서 매안으로 신행 오는 당당하고도 아름다운 효원아씨를 맞았을테고
학생복 차림의 강모를 수도 없이 보았을 듯 싶다.
이 곳에서는 효원도 강모도 허구만은 아니다.
문학관에 들어가기에 앞서 청호저수지를 들렀다.
저수지는 [혼불 문학관]이 올려다 보이는 바로 곁에 자리하고 있다.
혼불의 인물군 중 그 중심에 선 청암부인의 흔적을 가장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저수지이다.
청상의 몸으로 다 기울어져 가는 매안 이씨 집안을 뼈를 깎아 일으켜 세운 꿋꿋한 여장부, 그 기개를 차마 다 담을 수 없었던지 호수는 곧 바닥을 드러낼듯 수위가 저만치 내려가 있다.
매안에 가뭄이 심했던 어느 해, 거멍굴 사람들이 어둠을 틈타 저수지의 물고기를 잡아가던 광경이 눈에 선히 그려진다.
신성시 되던 저수지가 천민들의 발아래 사정없이 짓밟혔던 순간이다.
신성이 무너지면 평범도 못 되는건지..
조개바위는 어디쯤 있을까?
드러난 몇 개의 바위를 보며 궁금증을 키웠지만
조개바위라면 물 속이 제 자리가 맞겠거니 싶어 눈에 띄지 않음을 다행이라 여겨본다.
저수지 물 속에 달맞이 동산이 잠겨있다.
참으로 고요하기만 한 저 동산은 어느 해 정월 대보름 밤, 춘복이 떠오르는 달을 남 먼저 발견하고는 흡월을 하고 "달 봤다"를 외쳤던 곳이다.
자식만큼은 자신의 처지와 달리 양반의 아들로 만들고자 했던 머슴 춘복이, 달을 보며 소원을 빌고는
그 길로 양반가의 금지옥엽 강실을 찾아가 결국 겁탈하여 임신을 시키게 된다.
저수지 둑에서 바라본 [혼불] 속 매안의 배경이 된 노봉마을,
마을은 지난 날의 성쇠를 아는지 모르는지 흩뿌리는 빗방울에 조용히 젖고 있다.
저수지 둑에서 바라본 [혼불문학관]전경,
가벼이 날리는 빗방울을 맨얼굴로 맞으며 혼불 문학관으로 올라갔다.
평일인 탓인지 내방객은 우리를 포함한 서너팀.
문학관은 안팎이 모두 깔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문학관 내부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한 장면도 담을 수가 없었다.
작가의 집필실이 재현되어 있고, 취재수첩과 육필원고 등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혼불의 주요 장면들이 디오라마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효원과 강모의 전통 혼례식, 살구나무 아래에서의 강모와 강실의 소꿉놀이,
아들을 가지기 위해 달의 기운을 빨아들이던 효원의 흡월정 장면,
과수 인월댁의 베짜기, 강수의 영혼결혼식,
고갈된 청호저수지에서 거멍굴 사람들이 물고기를 건져올리는 장면 등이 재현되어 있고,
각 장면마다 소설의 내용이 성우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작가 최명희님의 말씀을 써 놓은 기왓장
-다녀간 이들의 방명 겸 소망이 누각 마루 한 켠을 채우고 있다
큰 못을 파고 노적봉과 벼슬봉의 산자락 기운을 가두어,
물이 찰랑찰랑 넘치면 가히 백대천손이 천추락만세향을 누릴 만한 곳,
문학관 마당의 바윗돌에 [혼불] 속 청암부인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청호를 조성한 청암부인의 간절한 소망이 배어나는 글귀이다.
솟대는 무얼 바라보고 있을까?
작가가 그토록 갈구했던 근원에 대한 그리움을 오늘은 솟대가 대신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근원에 대한 그리움이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그 윗대로 이어지는 분들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 가를 캐고 싶었다."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랴.
.
.
그리하여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풍화 마모되지 않는 모국어 몇 모금을
그 자리에 고이게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만일 그것이 어느 날인가 새암을 이룰 수만 있다면,
새암은 흘러서 냇물이 되고, 냇물은 강물을 이루며, 강물은 또 넘쳐서 바다에 이르기도 하련만,
그 물길이 도는 굽이마다 고을마다 깊이 쓸어안고 함께 울어 흐르는 목숨의 혼불들이,
그 바다에서는 드디어 위로와 해원의 눈물나는 꽃빛으로 피어나기도 하련마는,
나의 꿈은 그 모국어의 바다에 있다."
-작가의 말씀 중-
그 분이 그토록 사랑하던 모국어,
소설 혼불은 그 분의 소망 그대로
'모국어의 바다'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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