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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사랑후에 오는 것들

나무소리 2008. 10. 23. 17:09

할아버지는 말하곤 했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단다.

 기적은 없다고 믿는 부류의 사람들과

 결국 모든 게 기적이라고 믿는 부류의 사람들“


“바다는 말이야 세상에서 제일 낮은 곳이야.

 모든 물이 그리로 온다. 그래서 바다는 세상에서 제일 넓은 거지.“


“잘못은 사람들이 하는데 벌은 바다가 받는 거 같아,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홍이야, 나이가 들면 자신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때로는 축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단다.”


 육체가 정신을 이길 수 있을까,

의지가 환경을 이길 수 있을까,

진심이 편견을 이길 수 있을까......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게 아니야.

 그건 지옥으로 들어가는 거지.

 결혼은 좋은 사람하고 하는 거야.“


“엄마가 말이야, 아빠를 사랑하기는 하는데 좋아하지는 않는대.....

 그건 어떻게 다른 걸까 내내 생각해 봤어.

 사랑하면 말이야, 그 사람이 고통스럽기를 바라게 돼.

 다른 걸로는 말고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고통스럽기를.

 내가 고통스러운 것보다 조금만 더 고통스럽기를.....

 오래전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나는 너를.......“

민준이 내 입에 닭꼬치를 하나 넣어 주었다.

“맛있지? 안주 먹으면서 마셔.”

(중략)

“야아, 너 왜 내가 모처럼 좋은 말 좀 하려는데 입속에다

 뭘 자꾸 넣어가지고는 말을 못하게 하고 그래?“

 민준이 소주잔을 입에 가져가려다가 가볍게 웃었다

“내가 언제 못하게 했어.

 먹으면서 천천히 하라고 했지.

 말할 시간은 많을 거야.

 그러다 보면 그 말을 하는 동안,

 네가 말하는 그 감정이라는 것도 변해 가.

 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리고,

 네가 왜 그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게 되고.

 감정은 변하는 거니까. 그건 고마운 거야.

 변하니까 우린 사는 거야.“


“쏘아버린 화살하고

 불러 버린 노래하고

 다른 사람이 가져가 버린 내 마음은

 내가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어렸을 때 읽은 동화에 그런 말이 나왔었다.

꿈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마음껏 이 세상을 떠돈다고.

만일 당신이 꿈속에서 누군가와 만났다면

그건 그 사람의 영혼도 밤새 당신을 만난 거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어제 준고의 영혼도 나와 함께 이노카시라 공원 근처에 있었던 것일까.

세상에서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것은

흘러간 강물과 지나간 시간과 떠나간 마음이라는데,

밤마다 내 영혼만 호숫가를 서성이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쓰라렸다.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면 슬픈 귀가 열린다.


 헤어짐이 슬픈 건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만남의 가치를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

잃어버리는 것이 아쉬운 이유는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그 빈자리 속에서 비로소 빛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건

사랑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야 알게 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온 우주의 풍요로움이 나를 도와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문제는 사랑이 사랑 자신을 배반하는 일 같은 것을 상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랑에도 유효 기간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사랑의 속성이었다.

우리는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믿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이 가지고 있는 속임수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사랑의 빛이 내 마음속에서 밝아질수록

외로움이라는 그림자가 그만큼 짙게 드리워진다는 건 세상천지가 다 아는 일이었지만,

나만은 다를 거라고, 우리의 사랑만은 다를 거라고 믿었다.


“여자들은 말이야, 너무 매사를 사랑에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어.

 사랑에 집착하는 순간, 거기에 모든 걸 거는 순간, 남자는 떠나가는 거야.

 남자의 본성은 사냥꾼이거든.

 잡아 놓은 짐승보다는 아슬아슬하게 도망 다니는

 언덕 위의 날랜 사슴을 쫓아가고 싶어 하거든.

 우리 여자들이 할 일은 그들의 그런 본성을 인정하고 쿨해지는 거야.

 그래야 남자들의 사냥 본능을 만족시킬 수 있거든.“


‘지금 울고 있느냐?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고통과 불안이 사랑이라고 믿는다면 아프리카로 떠나라.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널려 있다.‘


‘홍아, 때로는 봄에도 눈이 내리고

 한겨울 눈발 사이로 샛노란 개나리꽃이 저렇게 피어나기도 하잖아.

 한여름 쨍쨍한 햇살에도 소나기가 퍼붓고,

 서리 내리는 가을 한가운데에서도 단풍으로 물들지 못하고

 그저 파랗게 얼어 있는 단풍나무가 몇 그루 있는 것처럼,

 이 거대한 유기체인 자연조차 제 길을 못 찾아 헤매는데,

 하물며 아주 작은 유기체 인간인 네가

 지금 길을 잃은 것 같다고 해서 너무 힘들어하지는 마.

 가끔은 하늘도 마음을 못 잡고 비가 오다 개다 우박 뿌리다가 하며 몸부림치는데

 네 작은 심장이 속수무책으로 흔들린다 해도 괴로워하지 마.’


“괜찮다. 네 나이 때는 정답을 못 찾는 게 정답이야.

 모범 답안으로만 살면 진짜 무엇이 옳은지 모르는 거야.“


 나는 비수를 꽂고 여기로 와 있다.

그와 동시에 실은 내 가슴에도 비수가 꽂혀 있었다.

주는 쪽과 받는 쪽, 상처라는 것은 양날의 칼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알까.

우리라는 그 말의 의미를?

우리 집, 우리 가족, 우리 아이들 그리고 우리 남편,

우리 아내의 우리라는 말은 이미 네 속에 내가 들어 있고

내 속에 네가 들어 있다는 뜻임을.

관계를 맺으면 나조차 네가 되고자 하는 한국인들의 마음을.

그리고 그것이 그를 향한 내 마음이었다는 것을.

처음부터 속수무책으로 그랬다는 것을.


“아빠, 사랑은 어쨌든 끝나는 거잖아.

 헤어져도 끝나고 결혼해도 끝나고......“


‘모든 것이, 마치 태어나고 죽는 모든 것이 그렇듯,

 예기치 않은 모든 사고와 만남과 사랑 혹은 한 인간의 성장이 그렇듯,

 모든 것이 그저 운명이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어요.‘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많이 망설이다가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부질없는 질문이라고.


 한번 심어진 사랑의 구근은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나도 죽지 않고 다시 일어나

조그만 싹을 내밀 것이다.

그런 구근의 싹을 틔우는 사람이,

먼 하늘 너머 있다는 것이 꼭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사랑한다고 해서 꼭 그를 곁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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