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책마을 산책

[한상숙] 당신의 손

나무소리 2008. 12. 5. 14:56

제   목 : 당신의 손

지은이 : 한 상 숙

읽은날 : 2008. 12. 1 - 3일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찬바람이 귓불을 스쳐 몸이 움츠러들 때면

투박하고 손톱에는 늘 때가 껴있던 엄마의 손이 생각난다.


 어린 시절 내 어머니는

저녁이 되면 늘 엎드려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다가

피곤에 지쳐 그대로 잠이 들다 간간히 졸음을 쫓느라

‘주여, 주여’를 웅얼웅얼 잠투정 식으로 외치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 내게 비쳐진 어머니의 손은

때가 잔뜩 끼고 갈라져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생겼던 것처럼

투박하고 볼품없었지만

그 손길이 닿을 때 아픔은 잦아들었고,

더러 동네 형들에게 놀림을 당했을 땐 가장 큰 위로였으며,

누군가에게 주눅 드는 일이 있을 땐 큰 힘이었다.


 한상숙의 [당신의 손]

이 책을 읽는 첫머리부터 마치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는 느낌이다.


 내가 어렸던 사진이 귀했던 때.

창호지로 바른 안방 문 위에는 초라한 액자가 걸려있었는데

그 액자에는 형들의 졸업사진과 약혼과 결혼사진 뿐 아니라

월남에서 찍어 보낸 외삼촌의 사진까지 들어 있었다.


 그 액자 속의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친가와 외가, 진외가 식구들의 면면이 들어있고,

가족의 역사와 한 사람 한사람의 생활이 들어있을 뿐 아니라

아픔과 기쁨을 거쳐 여행의 역사까지 살아온 과정까지 들어있었다.


 난 이 소설의 첫 부분을 읽을 때

시골 먼 친척의 집에 우연히 그냥 들렀다가

그저 방바닥에 혼자 앉아있기 멋쩍어 어색함을 떨치려

눈에 띈 액자를 바라보듯 무덤덤하게 소설의 첫 부분을 시작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목구멍에 주먹만한 뭔가가 치밀어 오르고

울컥 눈물을 쏟아 내기다 하다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책을 덮었다.


 내 어머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자식들에게 모든 걸 빼앗기고 쓰러져가는 초가집 흙담처럼 초라해진

여든 일곱의 한쪽을 쓰지 못하는 내 어머니다. 

 


 은이 아버지는 시골학교의 교감이다.

먹고살기 어려운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교원고시에 합격해 교직에 있으며,

박봉에 동생들까지 돌보다 보니 책 한권 사서보기도 어려운 경제력과 더불어

학연, 혈연 등의 인맥이 없어

인사발령 시 늘 뒷전으로 밀리는 아웃사이더 인생이다.


 집이 없어 학교 사택 한쪽에서 살아가던 중

윗 입술이 갈라진 언청이 장애를 가진 둘째 은남이를 출산하며,

그나마 무덤덤한 가정에 햇볕 한 줌 여유없는 음습한 아픔이 찾아온다.


“엄마 병신을 낳았어?”

나는 매몰차게 물었다.

“그래 은이야, 엄마가 병신동생을 낳았구나!”

(중략)

나는 우울했다. 예쁜 사내 동생을 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병원에 가서 고치면 될 테지 뭐. 엄마, 울지 마.”에서 마음이 짠하다.


  입술의 장애로 젖을 빨지 못해 늘 굶주려 울 수밖에 없는 장면.

그나마 분유를 먹여 겨우 젖살이 오른 맑은 눈동자의 모습.

자라면서 어른들이 싫어하는 것은 용케 알아서 하지 않는다는 것과

미국으로 입양만은 절대 안된다는 엄마와 아빠의 갈등 섞인 대화 등은

무덤덤한 표현이면서도 아무런 해답없이 한숨을 쉬게 하는 것이

책을 읽는 내내 눈물겹도록 안타깝다.


  어차피 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면 감사함으로 묵묵히 감수하겠다는

엄마의 노력은 참담하다.

돼지우리의 두엄을 치우는 일,

돼지가 새끼 낳던 날 피곤에 지쳐 잠깐 잠 든 사이 새끼를 낳아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새끼돼지를 살려내기 위한 눈물겨운 행동들.

점심은 자식에게만 먹이고 물 한 모금으로 한 끼를 때우는 모습들은

그 옛날 우리 어머니들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한 자식 사랑.


 파리는 불쌍해.

노랑 나비같은 예쁜 날개가

얼마나 얼마나 갖고 싶을까.

꺼먹 파리는 불쌍해.


  “결핍을 경험한 자만이 결핍의 아픔을 아는 법”이라는 평을 듣게 되는

은남이의 짧은 글을 읽으며 마음이 아릿하다.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하던 날

 

 "은남이 입 고치고 싶어?"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저씨가 은남이를 자알 고쳐 줄 테니 걱정 마라. 응?”

“예”

은남이의 눈은 천진함과 소망으로 광채를 띠고 있었다. 라는 대목과

학교를 가고 싶어 미국이라도 입양을 하겠다는 은남이의 의지나

교회에서 공책을 선물로 받는 이야기를 읽을 땐 눈물이 펑펑 솟았다.


 학교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째보”라는 남자아이들의 조롱을 들으면서도

모든 것을 감수하고 받아들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얼마나 깊을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과 뒤따라가며 그걸 바라보는

언니 은이의 가슴은 화산으로 재가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참담한 폼페이우스보다 비참하다.


 소설에서는 은이는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그제야 엄마의 마음을 헤아렸다.

식구들 앞에서 늘 떳떳하게 자기의 입장을 보이고자 하는 어린 것의 마음을,

놀림당하는 수모의 현장을 결코 가족들에게까지 보이고 싶지 않은 어린것의 자존심을,

엄마는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또 헤아리고 있었다.

바늘 끝으로 찌르는 그 아픔을 우리 가족은 모두들 저마다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소리없이 떨어져, 갠 빨래마다 점점이 젖어드는 엄마의 눈물방울이 그걸 말해 주었다.

‘훌륭하게 자라야 한다.’

나는 가만히 자는 애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네 편이 되어 줄 거야. 언제까지나 네 뒤에 섰을 거야. 난.’ (본문중)


 사춘기가 되면서

주희 엄마의 자살과 우연한 계기로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은이지만

사춘기의 갈등 속에서도 엄마의 옹이 박힌 손마디를 기억하고,

시꺼먼 기미가 얼굴의 반을 덮은 엄마,

순한 소처럼 억척으로 일만해서 두꺼비 등처럼 험한 손을 가진 엄마,

내 호적에도 없는 슬픈 엄마를 기억하며 아픔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그 순간.


 은이 속옷에 빨간 꽃이 피어 늦은 초경이 시작되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이 소설을 덮으며, 어떤 책에서 읽은 한 귀절이 떠오른다.

“십자가를 지고가지 말고, 품고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