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삶을 노래하며

기적같은 삶(가을날의 하루)

나무소리 2008. 10. 21. 14:27

 희뿌연 안개로 마치 꿈속 나라를 여행하는 기분으로 출근한다.


 집을 나서 공단입구에서 신호대기를 할 땐

그저 기차를 놓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초조하지만

옛날 대농 앞을 지나면서 기차시간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솔밭공원이 자욱한 안개 속에서 전원의 풍경을 드러내지만

소나무는 본래의 푸르름을 조금 낮추어 서민적으로 되어지고,

단풍나무는 화려한 빛깔을 줄임으로 더욱 고고해지는 자연을 바라보며

나도 조금은 낮아지고, 나만의 빛깔을 줄임으로 진정 자연인이 돼야지.


 자연을 보면서 시간에 쫓기기 보다는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

이래서 자연이 정말 좋은가보다.

기차를 놓치면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하면 될 테고,

다행이 기차를 타면 좀 느긋하게 책이라도 한줄 보면서

차창을 통해 전원의 분위기를 만끽하면 될 텐데 뭔 걱정이랴....


 중부고속도로 IC 앞을 지나면서

길 좌우에 서있는 플라타너스는 우람한 덩치에 걸맞지 않게

화려한 옷으로 자신의 모습을 뽐내면서

하얗게 피어오르는 안개와 한데 어우러져 가을을 노래한다.


 개중에는 친구들을 멀리하고 먼저 삶을 떠나

아스팔트 위를 구르는 하나의 낙엽이 된 이파리가

바람에 실려 정든 고향에서 쫓기고 있다.


 운명을 다한 등불이라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지만

새잎을 위한 하나의 희생일수도 있지...

네가 떨어져야 내년 봄에 또 새잎이 나올테니....


 청주 역에 도착하니 전형적으로 고압적인 자세의 역 건물이지만

늘 분주하게 개성없는 인간들이 분주히 들락거리는 도심지의 건물과 다르게

조금은 여유있는 공간에 느긋하게 오가는 사람들로

마음의 차분함을 얻기도 한다.


 두개의 평행선인 철길이 곱게 뻗어있는 플랫폼.


 기차 길과 아무런 추억도 없으면서도

마치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버린 분위기 있는 사람과

안개에 감싸인 철길을 걷지 않았나 하는

아슴한 추억으로 착각하게 하는 풍경.


 아슴아슴 가슴 졸이며

지금은 없어져 버린 검정 곤색 치마에 흰 브라우스 교복을 입은

70년대 여자 고등학생이 마치 깨금발을 떼며 나타날 것 같은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면서 혼자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러본다.


 그 옛날

고등학교 시절에 난 왜 그 흔한 여자친구 하나 없었지???

여자친구 하나쯤 있었다면 어린 시절 조금은 아파했을지 모르지만

멋진 추억 하나 갈무리 했을 텐데 말이다.


 기차는 어김없이 제시간에 도착해

자신의 옆구리를 갈라 설잠 깬 사람을 토해내고는

다시 나를 삼키고는 의미없이 기계음을 내며 가던 방향으로 또 간다.

습관적으로 아침이면 집을 나서는 나처럼.....


 옥산과 오창을 잇는 들녘의 누런 황금들판...

지난 여름동안 뜨거운 햇살을 맞고,

비가 오면 차가운 빗발에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자신의 삶에 충실함으로 이젠 알곡인 된 곡식들이

안개의 찬사를 맞으며, 마지막 자신의 삶을 축복할 농부의 손길을 기다린다.


 가을걷이를 끝낸 한쪽 들판엔 지난봄부터 여름까지

곡식의 자양분을 공급한 탯줄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며

겨울 동안 얻은 휴가를 무료함으로 달래고 있고,

논두렁 한쪽에는 늦여름부터 이제까지 들판을 지키던

허수아비가 어지간히 피곤했던지 논두렁을 베고 누워있다.


"피곤하시겠지...

밤낮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서서 계셨으니.....

이젠 좀 편히 쉬소서...."


 내 삶도 20-30년쯤 지나면 저렇게 초라하게 용도폐기 되겠지.


 신문을 펼치니 답답한 소식만 지면을 채우고 있다.

몹시 어려운 세계경제로 인해 우리 경제에 적신호가 울린다고 엄포를 놓고

농업 직불제로 잔돈푼에 목을 매던 이봉화 차관이 사임을 했고, 

연루된 국회의원을 포함해 국정감사를 실시하기로 했다는 씁쓸한 뉴스.


 사회면에서는 나를 더욱 놀라게 하는 뉴스가 있다.

31세의 남자가 어려운 경제여건과 자신이 무시당한다는 이유로

고시텔에 불을 지르고, 피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칼로 찔러

6명이 사망을 하고, 7명이 크게 다치는 일이 있었다는 기사내용.


그 중 정말 어렵지만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가족과 떨어져 중국에서 여기까지 와 힘겹게 살아가는 조선족의 극빈층이

다수 포함돼 있다는 것 등이 참 마음 아프게 한다.


'주여, 당신은 언제까지 이렇게 침묵하시겠습니까?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당신의 머리에 가시관을 쓰실 때

 당신의 옆구리를 창에 찔릴 그때에

 당신의 혀도 짤렸습니까?


 당신께서 말한 길과 진리와 생명도

 그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렸는지요.

 

 당신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몸만 부활했고

 진리며, 생명은 영원히 죽어버린 건 아닌지요.'


신문을 덮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증평역을 지나면 다시 평화로운 전원풍경이다.

한쪽은 충실한 알곡이 있는 농부의 땀과 사랑이 있는 들녘과

다른 한쪽은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가 있는 야트막한 산.

그 어느 것이 됐든지 자연은 하늘에 순응하며

나름대로의 법칙에 따라 또 다른 겨울이라는 세상을 맞을 준비를 한다.


 터널을 지나고, 음성에 가까워지며

풍요로운 과일들의 가을 향연이 눈으로 마음으로 바라보니

이럭저럭 충주역에 도착한다.


 오늘 하루를 난 또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 하루가 내 삶 전부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오늘 저녁 잠자리에 듬으로 그냥 잊혀져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을 뿐 아니라

내 기억 속에서 조차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허나 그렇다고 오늘 하루의 삶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은 또 다른 내일을 준비하고,

내게 전체의 삶에 아무 의미를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일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할 수도 있고,

내일의 환한 웃음을 웃기 위한 여유를 얻는 하루가 될 수도 있으니......


 지구촌에서는 어제도 참 많은 일이 일어났다.

한 조각 빵을 얻음으로 너무 행복해 환한 웃음을 웃는 이가 있을 수 있고,

풍성한 먹거리 속에서 말 한마디의 상처로 맘 아파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알지 못하는 사건사고로 헤어날 수 없는 고통의 받는 이가 있겠지만

난 그냥 어제와 같은 오늘이고, 오늘 같은 내일의 삶을 살아가겠지....


 이건 정말 행복이다.

또한, 이 자체는 기적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기적은 없다고 믿는 부류의 사람들과

 결국 모든 게 기적이라고 믿는 부류의 사람들......"


난 기적을 믿는다.

내가 오늘 아침에 눈을 떴다는 것은 기적이고

어제와 같이 또 행복하게 이 자리에 있는 것도 기적이다.


지금 이렇게 뭔가를 쓰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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