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탕의 희곡 [시라노]
시라노는 뛰어난 검객이자 천재적인 시인이다.
하지만 흉물스럽게 큰 코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 추남이다.
(대사 : 아냐 아주 크다는 말로는 부족해, 얼마든지 다른 식으로 말할 수 있었어....
예컨대 이런 거야, 들어 보라고, 공격적인 어조로 말하자면,
“선생, 나한테 그런 코가 달렸다면, 당장 잘라 버리지 않고는 못 배겼을 거요”
우호적인 어조로는,
“무얼 마시려면 어차피 코를 적셔야 할 판이니 주발을 하나 마련하시죠!”
묘사적인 어조로는,
“이건 바위야! 산봉우리야! 곶이야!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건 반도야!”)
시라노는 자기 사촌 동생인 록산을 사랑한다.
그녀는 여신처럼 아름다운 사람이다.
아마도 록산은 그의 용기와 재치에 감탄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못생겼다는 것을 알기에 끝내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
딱 한 번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품은 적이 있긴 하다.
그녀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서 만나자고 했을 때다.
하지만 이 면담은 가혹한 실망을 안겨 줄 뿐이다.
그녀는 빼어난 미남자 크리스티앙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 남자가 가스코뉴 귀족 지차(之次)부대에 새로 들어왔으니 잘 보살펴 달라는 것이다.
시라노는 연적의 보호자가 되는 극단적인 희생을 감수하고,
자기가 록산에게 하고 싶은 말을 크리스티앙이 대신하게 하는 방식으로
그녀를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인물 좋고 대담하지만 교양이 없는 크리스티앙에게
가장 감미로운 사랑 고백을 귀띔해주고, 열정적인 연애편지를 대신 써준다.
어느 날 밤에는 록산의 침실 발코니 아래에서 크리스티앙을 대신하여
그 유명한 키스예찬을 그녀에게 들려준다.
하지만 그토록 멋진 연기의 보상을 받으러 올라가는 것은 크리스티앙이다.
(독백 : 좋아요! 올라오세요,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그 꽃을 꺾으세요.....
올라와서 느껴 봐요, 마음의 맛을.... 꿀벌의 붕붕거림을..... 무한의 순간을!...)
그러자 시라노는 <어서 올라가, 이 짐승아!>하면서 자기 연적을 밀어 올린다.
두 남녀가 서로 껴안고 입을 맞추는 동안, 그는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미약하나마 자신의 승리를 음미한다.
(독백 : 사실 록산은 착각하고 있는 거야. 저 입술이 아니라, 방금 내가 들려준 말들에 입 맞추고 있으면서도 그걸 모르는 거야!)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은 전장터에 나간다.
록산은 갈수록 더해 가는 사랑을 주체할 수 엇어 그들이 있는 곳을 찾아간다.
시라노가 크리스티앙을 대신해서 매일 보내 준 편지들이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은 것이다.
그런데 록산은 시라노에게 뜻밖의 고백을 한다.
자기가 크리스티앙을 사랑하는 것은 잘생긴 외모 때문이 아니라
열정과 내면의 아름다움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설령 크리스티앙이 추남이라 해도 그를 사랑할 것이라고 말한다.
시라노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모든 것을 털어놓으려고 한다.
바로 그 순간, 크리스티앙이 적의 총탄을 맞고 죽는다.
록산은 불운한 연인의 시신 앞에서 흐느껴 울고,
시라노는 영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세월이 흐르고, 록산은 한 수도원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크리스티앙을 생각하면서 그의 피가 묻은 마지막 편지를 매일 다시 읽는다.
시라노는 그녀의 충실한 친구가 되어 토요일마다 그녀를 방문한다.
하지만 그 마지막 토요일에는 정적(政敵)들 또는 그를 시샘하는 문인들에게
해코지를 당한 뒤에 늦게 그녀를 찾아간다.
그는 머리에 두른 피 묻은 붕대를 록산이 보지 못하도록 모자로 감춘다.
록산은 크리스티앙의 마지막 편지를 처음으로 그에게 보여준다.
시라노는 큰 소리로 편지를 읽는다.
하지만 록산은 날이 어두워졌음을 알아차리고,
어떻게 그런 어둠 속에서 잉크색이 희미하게 발한 편지를 해독할 수 있는지 의아해한다.
그때 그녀의 머릿속으로 섬광이 스치면서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그는 크리스티앙의 편지를 읽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손수 쓴 편지를 암송한 것이다.
록산은 결국 크리스티앙의 모습을 한 시라노를 사랑한 셈이다.
(독백 : 지난 14년 동안 이 사람은 친구 역할을 하면서 나에게 웃음을 주러 왔던 거야!)
시라노는 아니라고,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애써 부인한다.
(아니요, 아니요, 내 소중한 사랑,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소!)
이제 우리의 주인공은 쓰러질 듯 비틀거린다.
그의 충실한 벗들이 달려오더니,
다친 사람이 침대에 누워있지 않고 여기에 왔다고 나무라면서,
록산에게 그가 곧 죽을 것이라고 알려 준다.
시라노는 의자에 앉아서 죽음을 맞을 수는 없다면서,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적들의 환영을 상대로 마지막 결투를 벌이다가 쓰러진다.
그때 그는 말한다.
자기가 얼룩 한 점 없이 온전하게 하늘나라로 가져갈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자기의 기개라고.
그가 연극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말을 하기 직전에
록산은 몸을 숙여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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