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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상속" 중에서...

나무소리 2008. 7. 21. 12:53

 우리 할아버지는 술 취하면 점잖게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을 부르는데 말야.

우리는 다 늙어갖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해가면서 촐싹거려야 하지 않겠냐.

그래서 내가 대꾸했지.

우리도 늙으면 아마 두만강 푸른 물을 부를 거라고.


  나는 늙은 뒤의 인생이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누구나 똑같이 공평하게 늙어간다고,

죽을 때는 더욱이 모든 사람의 인생이 마찬가지 아니냐고 말이다.

현실이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을 때 미래만큼 두려운 것은 없다.

[내 고향에는 이제 눈이 내리지 않는다] 중


인생은 반복되나 봐.

한 번 치인 덫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어른이 되어서도 늘 비슷한 일들이 닥쳐오거든.

그때마다 어린 시절 학습된 대로 반응하게 되고, 결과는 똑같아.

[누가 꽃피는 봄날 리기다소나무 숲에 덫을 놓았을까]


다윈 때문에 인간들은 자기가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원숭이의 후예라는 걸 알고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지.

거기다 또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들고 나와서

인간이란 스스로를 통제할 수조차 없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거야.

심각할 것 없어. 이젠 누구나 인정하는 일반 상식인데 뭐.


죽음의 선고를 받은 자들은 욕망을 거세받은 처지이므로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새로움을 받아들일 시간이 없으니 보수적이 되며 도덕적이다.

자신의 가족적 정체성에 대해 집착하게 마련이다.


아픈 사람이 밤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날이 밝으면 병원에 갈 수 있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나아질 희망 없이 극심한 고통을 지속적으로 겪어야 하는 사람,

이를테면 위액을 토해내기 시작한 말기 암 환자의 경우에는

병에 익숙해지라는 말이 만리 밖의 목탁 소리일 뿐이다.


N은 간병인이 손을 놀리는 대로 그 반동에 의해 힘없이 흔들거리는

아버지의 성기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검고 시들고 지쳐 보였으며 주름투성이였다.

그러나 모든 일을 끝마친 뒤의 엄숙한 침묵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아버지의 성기는 N이 지금 갖고 있는 육체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N의 육체의 모든 안팎은 농부가 땅을 경작하듯

아버지가 몸을 부려 세월 속에 거두어온 것이었다.

할 일을 마친 육체의 휴식은 존엄하다고 N은 생각했다.

[상속] 중에서


수녀님의 가르침대로라면

신이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도록 인간들은 계속 죄를 고안해내야 하는 건가요?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혼잡한 주말 고속도로에서 갓길에 정차해 있는 견인차를 보면

그 비슷한 생각이 드니까요.

견인차는 사고를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곳곳에 웅크리고 있지만

사실은 누군가의 차가 으깨지고 부서지기를,

그러니까 남의 불행을 간절히 바라고 서 있는 거지요.

불행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니 고마운 존재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타인의 불행을 기다리니 그 반대라고 해야 옳은가요.

때로 선과 악이란 건 참으로 불합리하게 얽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섹스가 끝난 뒤 남자의 몸이 슬그머니 빠져나갈 때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습니다.

상대에게 붙잡혔을 때 제 몸을 작게 만들어서 도망치는 것 중에

가장 이기적이고 약은 것이 남자의 성기라고 말이죠.

그는 제 몸에 붙잡힐 만하면 어느 틈엔가

몸 안에 차 있던 것을 얼른 내뱉고 변신하여,

식어빠진 오징어 튀김처럼 풀이 죽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딸기 도둑] 중에서


열흘쯤 지난 후에 상자를 뜯어보니 사과는 반나마 썩어 있었다.

썩은 것을 골라내면서

그녀는 사과 역시 자기들끼리 닿아 있는 부분에서부터 썩기 시작한다는 걸 알았다.

가까이 닿을수록 더욱 많은 욕망이 생기고

결국 속으로부터 썩어 문드러지는 모양이 사람의 집착과 비슷했다.

갈색으로 썩은 부분을 도려내봤지만

살이 깊게 팬 사과들은 제 모양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과 병동 같은 그 상자를 그날로 내다버렸다.


“꿈이란 참 이상한 거야.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꼭 그렇게 되어 보고 싶거든.

그것 때문에 인생이 일그러지고 깨질 게 뻔하더라도 말야.

힘들고 재미없는 때에도 그 꿈을 생각하면 조금 위안을 얻어.

이루어지건 안 이루어지건 꿈이 있다는 건 쉬어갈 의자를 하나 갖고 있는 일 같아.


삶을 지속하기 위해 육체는 늘 보살핌을 받는다.

인간의 삶이 육체가 있을 때까지만 존재한다는 데에 육체의 권능이 있었다.

아무리 멋진 정신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육체가 죽어버리면 하는 수 없이 멋 부리기를 끝내야 한다.

고통의 수식은 정신이 아니라

육체에 속한 세계의 규칙에서 비롯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녀는 위안 없는 생으로부터 잠깐씩 벗어나게 해주었던

꿈의 행방을 잃은 것에 새삼 고통을 느꼈다.

[내가 살았던 집] 중에서...


사람들은 이따금 슬프고 화가 나고 우울한데

이유는 의외로 하나일지도 모른다. 고독 말이다.

이유를 안다고 해서 고독이 없어지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그것이 고독이라는 걸 아는 편이 약간 나을 것 같다.

[태양의 서커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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