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은 제 스스로 까닭이 있다는 듯
어두운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나쁜 양부의 거짓말로 길러진 고아아이의 눈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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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왔으면...... 나는 속으로 탄식한다. 언제나 그렇다.
섹스가 시작될 때면 나는 비를 생각했다.
비의 냄새가 창틈으로 들어오고 커다란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리고,
훈훈한 습기가 파도처럼 벽을 지나왔으면,
추억과 감각과 잔털을 누이는 그런 따스함이 나의 꽃들을 천천히 벌려주었으면.......
섹스를 할 때면 우리가 가난하고,
우리에게 자극이 없는 날들이 오래 계속되어왔으며,
우리에게 꿈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에겐 떨임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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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산골짜기 외딴집에 사는 다 자란 남매같이 외로워진다.
우리는 이런 순간에 서로 지독하게 사랑한다는 것을 더 간절히 깨닫는다.
우리는 피를 섞은 근친상간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으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파고들기 위해 바둥거리지만 그것은 흡사 떨어져 나가려고
필사적인 것 같은 몸짓이기도하다.
이미 네 속엔 내가 너무 많고, 내 속에 네가 너무 많다.
나는 너와 다르고 싶다. 너와 구별되고 싶다.
우리는 떨어져나가기 위해 허우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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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밭에 생명이 자라지 않듯,
이 많은 사랑이 불모의 황무지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 기이하다.
(중략)
"바깥에서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도 몰라. 망가진 세탁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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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좀 내다버려주면 좋겠어.
공터에다 남몰래 내다버리는 망가진 냉장고처럼,
고물 세탁기처럼 내버려져서 실컷 비를 맞고 싶어.
실컷 햇볕을 받고, 바람에 휩쓸리고 술에 취하고 싶어. 정말이야.
답답해서 죽을 것만 같아"
(중략)
나의 허벅지살 같기만 한 지루한 감각.
나는 건조한 모래언덕 속으로 빠져드는 사람처럼 지루하게 허우적거린다
함께 몸을 붙이지도 않았지만 내내 전율이 일던 첫 데이트 날의
그 이상한 공기를 그리워하며.
그의 어깨에서 겨울바람 냄새가 났었다.
멍 빛깔의 해초 냄새같은 것이었다.
나의 머리카락에선 정말로 미나리 냄새가 난다고 그가 속삭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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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구름 속으로 잠행하는 밤처럼 나의 생은 어두워 보였다.
나의 욕망은 어디에 있는지,
깨어 나기도 전에 생은 노파의 배처럼 싸늘하게 주름지고 있었다.
어쩌면 모든 것이 잘못되어온 것인지도 몰랐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양부이며, 모든 교훈은 양부의 교훈이었는지도 모른다.
비가 왔으면......
그날 밤 우리는 거실 소파에서 건조한 섹스를 했다.
건조한 섹스란 나이프와 포크 부딪치는 소리만 나는 식욕없는 식사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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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이란 아무도 돌아나간 적이 없는 긴긴 동굴 같다.
모두 각자의 통로로 더 깊숙이 발이 빠지며 걸어간다.
기생들이 퇴기가 되고,
논리적인 여자들이 자살을 하고 착한 여자들의 몸이 부어오른다.
알을 품고 있는 닭들의 시간.
일곱마리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 누운 개와 돼지들의 시간,
젖내와 수마와 자기 분열의 시간.
성스럽게 파멸해가는 육체의 시간, 쑥과 마늘의 시간.
(중략)
그리고, 모든 친구의 남편은 어쩐지 그녀들의 아버지와 비슷하게 불편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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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땐 누구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 식대로 살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검은색 트렁크를 들고 아주 멀리 떠나기만 하면 완전히 다른 생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서른 살에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주 먼 곳에도 같은 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
세상에 대해서도 과대망상은 없다.
세상이란 자기를 걸어볼 만큼 가치 있지도 않다.
그것은 의미 없는 순간에도, 의미있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상영되고,
누구의 손에도 보관되지 않고 버려지는 지리멸렬한 영화 필림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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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떤 아버지를 만나느냐는 여자에게 최초의 운명이 된다.
젊은 아버지는 앞산에 진분홍 복사꽃이 핀 봄날 전축에 레코드판을 올리고
나에게 생애 최초의 것이 될 노래를 가르친다. 나를 커다란 무릎 위에 앉히고.
그 때 나는 네 살이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없어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슬프기 한이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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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대체로 열다섯 살이 되기 전에 제가 자란 고장의 가장 높은 산을 오르게 돼."
"왜?"
" 그냥, 이유는 없어. 누군가가 오르자고 하거나 오를 일이 생기게 돼.
그래서 우르르 오르는 거야. 난 그보다 더 어릴 때 아버지와 형제들과 올랐는걸.
무엇보다 남자들은 벌초를 하러 가야 하잖아.
노인들은 죽어서 높은 곳에 묻히고 싶어하고.
아버지들은 아들을 높은 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게 하고 싶어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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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에게 억울한 야단을 들었을 때나, 갖고 싶은 것을 포기해야 했을 때,
혹은 마음속에 말 못 할 슬픔이 차올라 아무도 모르게 넘쳐버릴 것 같은 때에도
역 울타리 바깥 길을 걸으며 사철나무 틈새로 난쟁이 가족을 보았다.
그들의 슬품은 너무 낮은 곳에 있어서 세상의 슬픔이 모두 그곳으로 흘러드는 듯했다.
때론 죽고 싶기까지 했던 당돌한 나의 슬픔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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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지나면 누구나 조금씩 덜 고단해질 것이다.
더이상 자기로부터 떠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해도 이제 그런 삶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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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며,
단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미소 지으며 두팔을 죽 뻗고, 그리고 열 개의 손가락을 폈다.
손금 안의 내밀한 길들을 향해 바람이 몰려왔다.
[새는 언제나 그곳에 있다- 전경린] 중에서...
출처 ; 문학동네 "서른살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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