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시인의 마을

[문성해] 아랫도리

나무소리 2013. 11. 8. 09:32

        아 랫 도 리

                         - 문성해 -

신생아들은 보통 아랫도리를 입히지 않는다
대신 기저귀를 채워놓는다
내가 아이를 낳기 위해 수술을 했을 때도
아랫도리는 벗겨져 있었다

할머니가 병원에서 돌아가실 때도 그랬다
아기처럼 조그마해져선 기저귀 하나만 달랑 차고 계셨다
사랑할 때도 아랫도리는 벗어야 한다
배설이 실제적이듯이
삶이 실전에 돌입할 때는 다 아랫도리를 벗어야 한다

때문에 위대한 동화작가도
아랫도리가 물고기인 인어를 생각해냈었는지 모른다
거리에 아랫도리를 가린 사람들이 의기양양 활보하고 있다
그들이 아랫도리를 벗는 날은
한없이 곱상해지고 슬퍼지고 부끄러워지고 촉촉해진다
살아가는 진액이 다 그 속에 숨겨져 있다

신문 사회면에도
아랫도리가 벗겨져 있었다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걸 보면
눈길을 확 끄는 그 말속에는 분명
사람의 뿌리가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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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시의 제목도 선정적이지 않으면 읽히지 않는 시대가 됐다.

그렇다고 시가 반드시 철학적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너무 자극적인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긴 본능에 충실한게 뭐 잘못됐냐고 한다면 할말은 없지.

 

 인간의 두가지 욕망인 삶과 죽음의 욕망이 모두 아랫도리에 있지 않나 싶다.

 

 아랫도리를 들여다본다는 것.

사랑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행위 아닐까?

 

 엄마가 사랑하는 자식의 아랫도리를 보는 것.

며느리라 자식들이 부모의 아랫도리를 보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는 것.

그 어떤 것도 사랑없이는 혐오스러울 뿐이다.

 

 이 시에 내 생각을 쓰면서 갑자기 [도리]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아래, 위에 왜 [도리]라는 말을 넣었을까?

모든 행위는 사랑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하고,

그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니 그 도리를 생각하라는 말 뜻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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