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밀한 기품’
‘평범한 삶의 아름다움’
‘잘 늙은 삶’
‘꽃으로써의 삶이 아닌 잎으로써의 삶’
이 책을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
작가의 필력이 대단하다.
조금도 흥분하지 않고, 그렇다고 무표정하지도 않다.
강한 절제력과 함께 굳게 다문 입 속에서도 모든 말을 한다.
그렇다고 강압적이지도 않다.
편안하면서도 담담하면서도 굳센 난초같은 필력.
조용한 여름 새벽 숲길을 서두르지도 그렇다고 게으르지도 않게
묵묵히 사색에 잠겨 걷던 한 수도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무표정하게 쳐다보는 느낌이다.
간간히 실린 흑백사진 속에는 작가의 내밀한 기품과 삶.
은밀한 자기 성찰과 함께 잘 늙어가는 멋.
저런 깊이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책을 본지 참 오래됐다.
아니 본 듯도 하지만 처음 읽은 특별한 책.
내 삶과 너무도 비슷한 길을 앞서 걸어가며,
이런 삶도 괜찮지 않나? 라는 잔잔한 충고를 준다.
첫 장의 ‘구름 가듯이’는 쉽게 여행기다.
쉽게 발품을 통해 몸으로 체험하는 삶의 여정.
23일간 오대산에서 스님들과 함께 생활하는 구도자의 체험을 비롯해
지리산 종주, 서해안 도보여행 등은
20여년 산을 쏘다니는 나와 너무 비슷한 역마살.
둘째 장,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곡선의 기울기가 변하는 ‘변곡점’이라는 글을 통해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활의 패턴이 바뀌는 현실과
광주민주화 항쟁을 소재로 다룬 ‘어느 의사의 절규’
베푼 호의가 화살이 되어 날아오는 ‘사건번호 0000’
죽음을 앞두고 힘겨워하는 어머니의 고통을 거둬주고 싶은 ‘불효자의 기도’
이 모든 것은 작가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내 이야기다.
비슷한 시대를 살아오고 살아가는 시대의 희비.
셋째 장, ‘사람, 사람들’
가장 아픈 상처가 사람에게 받은 상처라면
세상에 가장 큰 위로와 치유 또한 사람에게서 얻게 되는 걸게다.
문(門)은 사람이 소통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언제부턴가 이런 문은 관계를 막기 위한 것이 됐는데
마음의 문을 통해 가족과, 이웃과 소통의 길을 열어야 할 텐데....
넷째 장, ‘난향에 취하다’
소소한 삶의 자잘한 기쁨과 자아 성찰의 장으로
금붕어의 죽음으로 나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아픔.
나이가 들어가면서 건강을 통해 생체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서글픔.
마지막 가는 길에 한 번 더 좋은 일을 하라는 하늘의 뜻인 ‘웰 다잉’
이 글들을 통해 기쁨과 아픔, 삶과 죽음을 다시 생각해본다.
어쩌면 너무 비슷한 내 삶의 자취와 생각들을......
오래 전 장기, 기증 각막 기증을 하면서 자식들에게 남겼던 이야기와
내가 했던 염려를 포함한 모든 것이 어쩌면 그리 나와 같은지.
책을 덮는다.
내가 쓰려던 모든 이야기는 여기 다 있네.
이제 내가 책 쓸 일은 없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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