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다 남겨두고
- 서 정 홍 -
남편 일찍 여의고, 사십 년 남짓 혼자서 농사짓고 살던 생비량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둡도록 방에 불빛이 없어 들여다보니 앉은 채로 눈을 감으셨습니다.
마을 이장님과 할머니 수첩 속에 적힌 자식들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습니다.
서울 사는 큰아들은 "차가 꽉 막혀 조금 늦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전 사는 둘째아들은 "맞벌이하는 마누라 돌아오면 함께 가겠습니다."
부산에서 이혼하고 혼자 산다는 큰딸은 술에 취해
" 정말 돌아가셨습니까? 유언 같은 거 안 했습니까? 논밭들이 많은데....."
마산 역 앞에서 채소장사를 하는 막내딸만은 울면서, 소리 내어 막 울면서
"예에, 지금 당장 가겠십니더. 고맙십니더."
생비량 할머니는 제 뱃속에서 나온 자식들 얼굴 한 번 못 보고 돌아가셨습니다.
죽는 것도 어렵다고, 죽으면 살아 있는 사람 귀찮게 한다고,
그래서 낮에 죽더라도 자식들 퇴근하고 돌아올 무렵에 알려달라더니,
마지막 소원대로 그 무렵에 돌아가셨습니다.
낡은 벽지만큼이나 오래된 그리움 다 남겨두고.....
- 서정홍 시집 '내가 가장 착해질때'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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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아들일까? ㅠㅠㅠㅠㅠㅠ
죽어가면서 살아있는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
내 어머니의 이야기이고, 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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