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책마을 산책

슬픈 시간의 기억(책말)

나무소리 2009. 2. 13. 12:46

'품위란 남이 알아주기 전에 스스로 챙겨야 한다'


통정으로 아랫도리 문을 열자 시도 때도 없이 가랑이 사이가 열불로 달아올랐다.

서른을 갓 넘겨 한창 물이 오른 나이인데 폐병걸린 서방의 잠자리 농사가 영 시원치 않자

가지밭과 오이밭만 보아도 금방 아래가 축축해져 절로 거기에 손이 갔던.....


아이들은 자고 나면 얼마만큼씩 자란다.

그러나 신체의 어느 부위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 수도, 볼 수도 없다.

윤선생은 교직을 떠난 지 이십 년이 흘렀지만 지나간 교사 시절,

새 학기에 새 반 담임을 맡은 뒤 한 학기가 바뀔 일 년 사이

아이들은 어느새 몰라보게 한 뼘 식은 키가 커버리곤 했다.


유대 땅을 넘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유럽에 처음 전파한 바울이 전도 여행 목적지로

정한 스페인으로 가기 위해 로마에 잠시 들렀다 그곳에서 잡혀 순교하게 되었으니,

인간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다른가를 그네가 깨닫기도 그때였다



저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교사로서의 품위를 보이려 위선이란 옷을 입고,

모범으로 꾸미며, 내 몸을 상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멸시를 당했거나 수난과 박해를 겪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해 정의와 자유와 사랑을 위해

비바람 맞으며 앞장서서 나서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같은 죄인이 주님이 계신 하늘나라에 들 수 있을까요?"


삶이란 지식의 축적으로 요약될 수 없고

그 누구도 삶의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않는다란 독학자의 허무적 인식은

당시 자신의 앞길에 예시가 되기에 충분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늙음이 추하다.

고목처럼 의젓하지 못하고 살아 있음이 오히려 욕되어 보인다.


장자의 인간세편에 보면 이런 말이 있지.

몸집만 컸지 베어지면 그 용도가 맞춤한 데가 없는 가죽나무가 목수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인간세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나무가 되기를 바라기 오래라

열 번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살아남았다고.

장주가 무용(無用)의 용(用)을 설파한 말이지.


『게놈』을 읽으니 인간의 유전자는 스물세 쌍의 염색체 안에 모두 들어 있다더군.

그게 다시 가지를 쳐 모두 이만 육천에서 사만 개로 구성되어 있다잖아.

스물세 쌍으 염색체는 일반을 ‘생명’으로,

이번을 ‘종’으로, 삼번을 ‘역사’, 사번은 뭐라더라?

하여간 그렇게 지정해 놓았는데......


인생으 운명이 바뀌기는 늘 한순간이 결정한단 말이야.

한길을 나섰다 달려오는 차에 치이는 교통사고를 따져봐.

몇 초 빨리 길을 건넜거나 몇 초 늦게 나섰다면 피할 수 있는 액운이었고,

차 기사도 몇 초 빨리 지나갔다면 사고를 안 냈을 것 아냐.

쌍방 순간적인 액운이 맞아떨어진 게지.

이를 두고 사르트르는 필연이 아니고 우연이라 했어

태어남이나 세상과의 관계도 나는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라고 믿어."


삼라만상을 봐. 풀 한 포기에서 부터 나무까지, 사자든 사슴이든,

메뚜기든 벌레든, 물고기와 수초, 흐르는 물과 대기를 채운 공기, 구름과 번개,

그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이 제자리에서 제 역할만 할 뿐 있듯 없듯,

자연은 그렇게 공존해. 위대함과 비루함이 없고 잘남과 못남이 없어.

순리란 무명 속에 물이 흐르듯, 권위와 명예를 다투지 않아.....


풀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소가 풀을 먹듯 늙은이들은 추억을 먹고 살아.

그러나 요리된 음식을 원재료로 돌려놓을 수 없듯,  흘러간 추억을 돌려놓을 순 없어.

네가 오기 전 나는 창밖의 나무 끝을 보고 있었어.

나무는 천천히 성장하고 아주 천천히 죽어. 느린 삶을 오래 사는거지.

인간이나 짐승은 그럴 수 없지만 아주 늙은 나무가 때때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으면

잎과 열매를 많이 매달아 제 무게에 겨워 가지가 스스로 꺾어지게 하지.

그렇게 늙은 가지를 쳐내고 그 자리에 새 가지를 만들어 내기도 해.

뿌리와 몸통은 죽지 않고 말야. 그게 신비하지 않니?


격정, 두려움, 저항으로, 보통은 거부로.

우리는 이별이 주는 상실감 앞에서 인간들이 보이는 반응을 일반적으로 슬픔이라 부른다.

인간은 이 슬픔을 통해서만 상실감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시작을 할 수가 있다.

스스로 끝내지 않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끝냄을 당한다. -발레리-


슬픔은 기억이 존재하는 한 잠재울 수 없으니,

죽자고 참는 수밖에.

참고 참는 방법 외 눈물 닦고 봐도 어디에도 위안은 없더라.

결국은 몸이, 내 눈이 이렇게 가듯,

스스로 슬픔을 죽이는 방법을 찾아내.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넌 모를거야


늙은이들은 외로워도 참고, 아파도 참고, 그리워도 참고 살지.

모진 성깔만 남아 화를 내고 누구에겐가 욕질하며,

욕질하다 슬퍼져 그리워하며, 그렇게 참는 게야.

참을 수밖에 없잖아.

늙은이들은 그렇게 슬픔에 갇혀 겨우 숨을 쉬지.

그러나 그 슬픔에서 해방되어 새로 시작할 무엇도,

심지어 슬픔을 깨달을 자각력도 마비되어 있어.

이젠 죽을 때가 됐다는 푸념을 입에 달고 살지만 내심으론,

사오년쯤, 아니, 십 년쯤은 죽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면서 말야.

죽는다는 게 두려워 그렇게 참고 견디지만 죽음은 의외로 빨리 닥쳐.

몸이 죽으면 혼미한 정신도 체념 상태가 되어 마지막 순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