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무김치가 슬프다
너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은 장날이었지
열무 두 단을 샀어
시들어 버린 오후
짚으로 묶인 허리가 짓무르고 있었지만
어디 내 속만 하겠어
벌레 갉은 구멍 숭숭했지만
묵직했어 고작 두 덩어리지만
무수한 몸이 한 데 묶여 있었거든
돌아오는 길은
그래서 무겁고 길었어
신문지를 깔고 털퍼덕 앉아 다듬었지
뿌리 잘라내고 웃자란 잎도 잘랐어
나를 다듬고 있었는지도 몰라
반쪽으로 꿈틀대는 애벌레처럼
희날재 어디쯤 지나고 있을 너를
지금이라도 따라 갈까
망설이기도 하면서 말이야
굵은 소금을 뿌리며 생각했어
잘만 버무리면
고추장에 쓱쓱 비벼 슬픔도 보리밥처럼
넘길 수 있을 거라고 말이지
너를 배웅하던 정류장까지도
아마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거야
안 그래?
- 권선희 시집 '구룡포로 간다'(애지, 2007년) 중에서
* 이 시의 화자는 이별을 하고 돌아옵니다. 돌아오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열무 두 단을 삽니다. 열무를 사고 그걸 다듬고 절이는 일은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일상으로 돌아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화자가 움직이며 가는 길을 따라가는 동안 이 이별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이별인가를 알게 됩니다. 짓무르는 열무잎도 내 속만은 못하다고 말합니다. 한데 묶여 있는 열무를 보면서 한데 묶일 수 없는 자신들을 생각했겠지요. 열무 두덩어리를 들고 오는 길이 무겁고 긴 건 이별의 아픔이 무겁고 길다는 뜻이겠지요.
열무를 다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아픔을 다듬고 있는 것이고, 지금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갈까 하고 갈등하기도 합니다. 열무김치가 아니라 슬픔을 어떻게 버무리고 비비고 씹어 넘길까를 생각하는 화자의 마음은 '애이불비(愛而不悲)'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솔직한 자리에 가 있습니다. 슬픔을 과장하지도 않지만 사소한 것으로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태연한 듯 앉아 있지만 슬픔을 어찌하지 못하는 자신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켜보고 있는 그 심정적 거리가 미적거리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열무김치를 다듬고 있는 그 시간, 이별 이후의 순간 순간이 얼마나 아픈 시간인가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권선희 약력
1965년 춘천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예대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1998년 '포항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푸른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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