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시인의 마을

시인의 편지 1) 꽃과 부활

나무소리 2009. 4. 9. 11:38

                          도종환의 '시인의 편지'


 꽃이 잎으로 몸을 바꾸고 있습니다.

백목련 꽃은 연초록 잎으로 몸을 바꾸면서 흙빛으로 탄 꽃잎들을 버립니다.

개나리꽃도 노란 꽃잎을 땅에 내리면서 초록 잎을 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꽃을 영원히 붙잡아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꽃나무는 없습니다.

지금 몸을 바꾼 잎을 언젠가는 열매로 바꾸고 그 열매 또한 누군가에게 주고 갈 것입니다.

꽃도 열매도 푸른 잎도 영원히 내 것이라고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꽃나무는 잘 압니다.

그게 꽃이 가는 길이요, 다시 사는 길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이 집, 이 옷, 이 몸뚱이는 영원히 내 것인가 하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은 내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집은 그 안에 몸담아 사는 동안 하느님께서 내게 빌려주신 물건입니다.

  내가 입은 이 옷은 내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옷은 낡아서 해지거나 나보다 헐벗은 이에게 벗어줄 때까지 하느님께서 내게 빌려주신 물건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몸뚱이는 내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몸은 내가 태어나던 날 하느님께서 빌려주셨다가 내가 죽는 날 도로 가져가실 물건입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을 구성하여 만들어내는 머리는 내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또한 내 생일에 하느님께서 빌려주셨다가 죽을 때 도로 가져가실 물건입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가진 걸까요?

  도대체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게 있기는 한 겁니까?

  있지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성장하고 내 안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덕목들, 그것들은 내 것입니다.

  내가 사랑 안에서 성숙한 그만큼 나는 사랑을 가진 거예요.

  믿음 안에서 성숙한 그만큼 나는 믿음을 가진 겁니다.

  온유함 안에서 성숙한 그만큼 나는 온유함을 가진 거지요.

  이것들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것들로 하늘나라가 가득 차기를 바라실 테니까요. 이 모든 덕목들을 담고 있는 내 영혼도 물론 내 것이지요.


--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단순하게 살기'에서 --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잠시 내게 빌려 주신 것입니다.

재물도 지위도 명예도 육신마저도 잠시 빌려 주신 것입니다.

영원히 내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빌려주신 걸 가지고 사는 동안 사랑과 믿음과 온유함과 아름다운 덕목들을 지니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고마워해야 합니다.

꽃나무들도 꽃과 열매와 잎을 하느님께서 잠시 빌려주신 거라고 생각할까요?

백목련 지는 동안 연보랏빛 라일락 피어 향기로운 걸 보면서 나는 그렇다고 믿고 싶어집니다. 사흘 뒤면 부활대축일입니다. 꽃에서 잎으로 옮겨가는 꽃나무를 보며 가장 아름다운 걸 버리면서 다시 살아나는 꽃의 부활을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