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타인에게 말걸기
타인에게 말걸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견디기에 가장 어려운 것은 불행이 아니라 권태야.
하지만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에 현상을 바꿀 의지없이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 권태의 장점이지.
난 욕먹는 게 좋아.
욕을 먹기 시작하면 못할 일이 없거든.
그런게 자유 아냐?
“이거 한번 껴봐요.
이런 세련된 물건은 아가씨 같은 멋쟁이가 껴줘야지 반지 입장에서 보람이 있지.
한번 껴보라니까. 부담 갖지 말고, 자.
야아, 진짜 임자 만났네.
8천원은 받아야 하는데 물건 임자가 가져간다니 어떻해. 7천원만 받아야지“
그녀는 가운뎃손가락에 진주반지를 끼었다.
넷째손가락에서 장식 없는 금반지가 진주반지의 침입을
마치 나란히 누운 시앗처럼 마땅찮게 쳐다보았다.
백팔번뇌의 108은 사람의 여섯가지 감각이 여섯가지의 번뇌를 일으킬 때
과거. 현재. 미래가 있어 그것들을 곱해서 나오게 된 숫자라고 했다.
여섯가지 번뇌는 좋음. 나쁨. 즐거움. 괴로움뿐 아니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음’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음’도 들어있었다.
사랑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말은 그녀가 중학교 때나 좋아했던 어떤 프랑스 소설가의 말이었다.
“영가는 죽은 사람의 넋이고, 천도란 그 넋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산 사람들이 재를 올려서 죽은 사람을 극락왕생하게 도와주는 거지요.“
달을 보았으면 손가락을 잊어버리고
지붕에 올랐으면 사다리를 잊어버리고
개울을 건넜으면 징검다리를 돌아보지 않으며......
‘기상청은 한랭전선이 지나갈 때 대기가 불안정해지면서
구름 두께가 평시보다 2배 이상 두꺼운 10킬로미터 정도 되는 경우가 있으며....’
평시보다 2배 이상 두꺼운 10킬로미터.
그렇다면 보통 때에도 구름두께는 5킬로미터나 된다는 말이다.
머리위에 늘 5킬로미터나 되는 구름이 싸여 있어 보지 못했던 것이다.
타인 속의 허상을.
[그녀의 세 번째 남자] 중에서
**************************************************************************
누구나 피곤할 때는 그 피곤의 이유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눈앞의 대상까지도 피곤한 존재로 여기게 되는 법이다.
만나자마자 씻은 듯 피곤이 사라지는 관계란 있을 수 없다.
아이들이 모조리 졸고 있는 한여름 오후 수업시간에
관성의 법칙을 설명하고 있는 물리교사처럼,
뻥튀기를 먹으며 잡담만 하고 있는 관객을 향해
격정의 대사를 외고 있는 연극배우처럼 여자는 한꺼번에 피로를 느낀다.
[특별하고도 위대한 연인] 중
**************************************************************************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두 사람 각자의 계산은 모두 끝난다.
합산이 시작된다. 그때부터 할 일은 이제 서로 사랑하게 되는 일이다.
언니는 그렇게 말했다.
감정이란 변하고 사라지는 거야.
결혼은 변하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결정하는 게 좋아
[연미와 유미] 중
***************************************************************************
한 과부가 남편의 무덤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무덤의 흙이 말라야 개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장자의 아내는 분개한다. 그러나 장자가 죽자마자 그녀는 문상 온 후왕자에게 교태를 부린다. 금방 죽은 사람의 골을 파서 눈에 얹어야 낫는다는 후왕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장자의 관까지 뜯는다.
여자란 다 잠정적 과부라고. 품속에 부채 하나씩은 갖고 있을걸.
[나비의 과부]
우리는 모두 삶에 속는다. 그러나 굳이 속지 않으려고 애쓸 이유도 없다.
유한한 앎을 가지고 무한한 삶을 어떻게 알 것인가.
알려고 하면 더욱 위태로워질 뿐이다(장자)
[짐작과는 다른 일들]
************************************************************************
여자들은 먹는 일에 자기 돈의 절반을 쓰고,
다시 빼는 일에 나머지 반을 쓴다는 재담으로 한바탕 웃음을 자아냈다.
[빈처] 중
*************************************************************************
사랑은 섹스가 아니라 섹스 후에 함께 잠드는 일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도 났다.
[먼지속의 나비] 중
자식이란 부부가 함께 산 세월에 대한 가장 뿌듯한 추억이기도 하지만,
가장 정직한 상처라는 생각을 한다.
그 말은 자기 자식을 이혼한 가정에서 살게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자식에게 고스란히 투영돼 있는 공동의 추억을 차마 저버릴 수 없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있을 때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 커다란 매력이었지.
하지만 사랑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그것이 더욱 증오를 키울 뿐이야.
[이중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