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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의 벽, 완벽, 문경지교, 부형청죄

나무소리 2007. 9. 6. 14:26

초나라 사람 화씨(和氏)가 어느 산중에서 옥의 원석을 발견했다.

그걸 소중히 받들어 임금(여왕)에게 바쳤다.

임금이 전문가를 시켜 알아보게 했더니 돌맹이일 뿐이라는 감정이 나왔다.

왕이 웬 미친놈이 장난질이냐면서 화씨의 왼쪽 발꿈치를 자르는 형벌을 내렸다.


여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하자 화씨는 다시 그 원석을 받들어 임금에게 바쳤다.

무왕이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해 본즉 여전히 돌맹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이번에는 화씨의 남은 오른쪽 발꿈치가 잘려나갔다.


무왕도 죽고 문왕이 즉위하자

화씨는 그 원석을 끌어안고 초산(楚山) 아래서 사흘 낮 사흘 밤을 통곡하는데

눈물이 다하자 피가 배어나왔다.


왕이 그런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 까닭을 물어보게 했다.

“세상에 벌을 받아 발이 잘린 사람이 너 하나뿐이 아닌데

어인 일로 그리 비통하게 울고 있단 말이냐.”

“발꿈치 때문이 아니라 보배로운 옥인데도 돌맹이라 우기고

정직한 사람을 미친놈 취급하는 것이 비통해서 그럽니다.”


왕이 세공인을 시켜 다듬어 보게 했더니 영롱한 보배가 나왔다.

이것을 이름하여 화씨의 옥(和氏之碧)이라 한다.



마침내 이 구슬은 장안에 제일 가는 장인의 손을 거쳐 휘황찬란한 빛을 뿜게 되자

그 구슬은 수백년간을 천하의 보배로 내려오다가 전국 중엽

우연히 조(趙)나라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사마천이 지은 불후의 역사서 《사기(史記)》에는

그때에 일어난 사건 하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화씨구슬의 소문을 들은

진(秦)나라 소왕(昭王: 기원전 307-251)이 소문을 듣고,

초나라 성 열 다섯을 줄테니 구슬과 맞바꾸자고 제의했다.


이 문제를 놓고 조나라 왕이 여러 신하 장군들과 의논을 벌이는데

제의를 받아들이자니 초나라가 성을 내놓을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안 주자니 그걸 구실로 군사를 몰고 쳐들어 올 것 같고...

사기를 당하느냐 전쟁을 벌이느냐로 조정이 고민에 빠졌다.


이때 환관들의 우두머리였던 목현이 나서서 식객으로 있던

인상여(藺相如)란 사람을 추천했다.


“제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용기도 있고 지모(智謀)도 있어

이번 일에 적임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왕은 인상여를 사신으로 보냈다.

인상여가 공손히 받들어 올린 구슬을 보고 진나라 왕은 매우 기뻐하며,

궁녀들에게까지 돌려가며 구경을 시켰고,

여기저기 만세(萬歲)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도 진왕은 성을 내 놓을 생각은 하지도 않자 인상여가 앞으로 다가가서는,

“그 구슬에는 티가 있습니다. 제가 보여 드리지요” 라며

인상여가 왕에게 말하자 왕은 구슬을 인상여에게 내주게 된다.


그는 구슬을 불끈 잡아 쥐고 기둥에 착 붙어 서서 성난 기세로

“대왕께서 구슬을 갖고 싶다 했을 때, 조나라 왕과 여러 신하들은

‘욕심 많은 진나라가 힘을 내세워 공수표로 구슬을 챙기려는 수작’이라고

구슬을 보내서는 안된다고 다들 반대할 때,

‘미천한 백성들도 서로 속이는 법이 없는데

하물며 나라와 나라 사이의 약속을 저버리겠느냐’고 저혼자 왕을 두둔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왕께서는 닷새를 목욕재계하시고 저에게 구슬과 편지를 들려

이곳으로 보내시는 대국에 대한 경건한 예를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일국의 신하를 자기 아랫사람 보듯이 거만을 떨면서

성을 내줄 의사가 없으신 듯 하와 구슬을 도로 챙긴 것입니다.

만일 힘으로 빼앗으려 하시면 이 기둥에다 머리와 구슬을 한꺼번에 부딪쳐

구슬을 깨버리고 저도 죽겠습니다.”


구슬이 깨질까 염려한 진나라왕은 그를 어쩌지 못하고 땅을 넘기겠다는

약속을 하지만 인상여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숙소로 돌아온 인상여는 다른 사람에게 구슬을 주어 조나라로 보내 버립니다. 

인상여는 진왕이 구슬에만 욕심이 있다는 걸 알고 자신이 죽을 각오로

구슬을 몰래 고국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진나라왕은 그를 죽이려 했지만 구슬도 없는 터에

외교적 문제를 굳이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돌려보내 줍니다.




이런 인상여의 목숨을 건 지혜로 조나라는 망신당하지 않고

그 위엄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진나라 소양왕은 조나라 혜문왕과 화합을 다지는 자리를 갖자며

민지에서 만나자고 제안했습니다.


본래 권모술수가 판치던 시절이라 인질이 될지도 몰라

조왕은 망설였지만 결국 인상여가 수행하게 되는데 술이 한 순배 돌자

진왕은 조왕에게 비파연주를 부탁하고 조왕은 울분을 참고 비파를 연주합니다.


그러자 진왕은 사관에게 “조왕이 진왕을 위해 비파를 연주했다”는 사실을

기록해 두라고 합니다. 조왕이 치욕을 당하고 있을 적에 인상여가 장구를 들고

진왕에게 나가 조왕을 위해 장구를 한번 쳐 달라고 합니다.


인상여의 무례함에 진왕의 호위병들이 달려들자 인상여가 호통을 칩니다.

"나는 지금 칼로 내 목을 찔러 다섯 걸음 안에 대왕께 피를 뒤집어씌울 수 있다."

자기 목을 찌른다고 말했지만, 수틀리면 진왕을 찌를 수도 있다고 겁을 준 것이다.


진왕은 별 수 없이 장구를 연주했고,

인상여는 즉시 사관에게 진왕이 조왕을 위해 장구를 쳤다고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두번의 중요한 순간에 인상여는 목숨을 걸고 조나라의 존엄성을 지켰고

그 공로로 높은 상경의 벼슬에 앉게 된다.


그때 염파라는 조나라 장수가 자신의 밑에 있던 자가 높은 벼슬에 오른걸 보자

"내가 성곽을 공략하고 전투에서 세운 공로가 얼마인데,

세치 혀를 몇 번 놀린 비천한 출신인 인상여가 나 보다 높다니 말이 되는가?“

불만을 품고, 인상여를 만나면 단단히 수모를 주리라 벼르고 있었습니다.


직위도 낮은 건방진 염파였지만 인상여는 염파를 피했습니다.

염파의 대놓고 높이는 비난에 대꾸 한마디 하지 않았고,

길거리에서 마주칠 듯하면 수레를 돌리도록 했습니다.


인상여의 이런 행동은 손가락질 대상이 되었고,

모두들 인상여를 졸장부라 놀렸습니다.

어느 날 한 부하가 부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다고 불만을 터트렸습니다.


인상여는 그 말을 듣고

"자네가 보기에는 염장군과 진왕 중에서 누가 더 무서운가?"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당연히 진왕이 더 무섭죠."


인상여가 또 말을 합니다.

"그렇다. 진왕은 모든 제후들이 호랑이처럼 두려워한다.

그러나 나는 그를 만날 적마다 두려움 없이 단호히 꾸짖었다.

내 비록 큰 힘은 없으나 염장군을 두려워 할 처지는 아니다.

허나 잘 한번 생각해 봐라.

그 강성한 진나라가 우리를 얕잡아 보지 못하고 침략하지 못하는 것은

염장군과 내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둘이 싸운다면 어찌 되겠는가?

나라의 이익을 앞세우고 개인의 사사로운 공명심은 뒤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염파는 이 말을 전해 듣고 부끄러워

옛 의식대로 윗도리를 벗고 가시나무 회초리를 짊어진 채 인상여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나는 식견이 없고 도량이 좁은 사람입니다.

당신의 관대함에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저를 회초리로 때려 주십시요."(負荊請罪)


마침내 염파와 인상여는 화해했습니다


진나라는 그후 감히 조나라를 공격하지 못했고,

염파와 인상여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서로를 배신하지 않기로 맹세‘했고,

생사를 함께 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유명한 '문경지교(刎頸之交)'입니다.


'문경지교'라는 고사성어에는 이렇게 나라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녹아 있었던 것입니다.


작은 공명심, 부질없는 부와 권세를 자랑하기 보다는

모두를 포용하는 크고 넓은 마음을 키워갔으면 좋겠습니다.

서로를 배려하며 화목하고 아름다운 만남을 이어 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