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마당/시인의 마을

[신경숙]깊은 슬픔

나무소리 2005. 2. 14. 10:24

 깊은 슬픔

        - 신 경 숙 -

 

난 그렇게 되어버렸지

너에 의해 죽고 싶고

너에 의해 살고 싶게 되어버렸지.


네가 며칠 있다가 전화하겠다고 하면

나는 그때부터 아무 일도 못하고 전화를 기다리지.

다른 일들이 다 짜증스럽기만 해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무슨 벽보에

사랑이란 서로에게 시간을

내주는 게 아깝지 않은 것, 이라고 써 있었지.


금방 너를 생각했어.


언제부턴가 내게 시간을 내주지 않는 너를.

그 풀칠이 덕지덕지한 벽보 앞에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얼마나 절망했는지

매사가 이런 식이야


나는 그렇게 되어버렸어.